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사회적 약자가 이 세상과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
죄의식 없이 누가 더 뻔뻔한가를 경쟁하고, ‘가해자’의 마음이 평화로운 사회.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 “왜 그렇게 분노가 많냐.”고 말하는 사회. 자녀를 잃은 슬픔을 국가 체제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사회. 이런 시대에 약자가 지닐 수 있는 무기는 무엇인가?
정희진에게 무기는 바로 ‘글쓰기’다. 그에게 글쓰기는 약자의 시선으로 타인과 사회를 탐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과정이다. 내 안의 소수자성을 자원으로 삼아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연대하면서 세상을 배우는 일이다. 이것이 정희진이 말하는 시대에 맞서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으로서 글쓰기다.
품위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겐 ‘있되’, ‘적’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적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내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주어진 지면조차 감당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 머리말·14쪽
“글을 쓰는 이유에는 네 가지가 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 미학적 열정, 역사에 무엇인가 남기려는 의지, 정치적 목적.
나는 모두 아니다. 나는 승부욕이다. 나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의 첫 번째 책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에는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 혼’이 담겨 있다. 이 책에 실린 63편의 글에서 저자는 글쓰기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글쓰기의 윤리에 관해 끊임없이 성찰한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 저자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 사람에게 글쓰기의 어려움과 ‘쉽게 쓰기’는 모순되지 않음을 발견한다. “글쓰기의 핵심은 정치학”이라는 연암 박지원의 말에서 상대를 설득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려면 독자, 주제, 나의 위치를 다각도로 고려해 모든 힘을 쏟는 것이 글쓰기의 과정임을 배운다. ‘세월호’를 쓰면서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함을 깨닫는다.
정희진은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쓰려면, 나부터 ‘나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를 검열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동반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나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찾아가는 여정이어야 한다. 흔히 말하는 글의 문장력과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은 이 ‘몸부림’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처럼 정희진에게 글쓰기는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는 일이다. 그는 이런 괴로움 속에서 ‘최선의 올바름’, ‘아름다운 문장’이 나올 수 있다고 믿으며 묵묵히, 치열하게 글을 쓴다.
“페미니즘을 만난 나는 운이 좋았다.”
정희진은 비평, 칼럼, 논문 등을 통해 ‘남성 언어’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통념과 상식을 뒤흔드는 논쟁적인 글을 쉬지 않고 써 온 필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는 글쓰기의 어려움에 관한 저자의 솔직한 고민을 만날 수 있다. 머릿속 생각이 손에 이르러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고통스러운 과정, 처음 쓴 글의 망신스러움 등 글쓰기의 어려움에 관해 털어놓는 저자의 고백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칼럼이든 논문이든 쉬운 글쓰기는 없다. 특히 젠더를 주제로 삼은 글은 더욱 그렇다.
문제는 ‘작가’가 다소 시끄러운 직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글쓰기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르고, 나의 관심사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온갖 논쟁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젠더 관련한 글은 여성도 남성도 불편하게 한다. 당파성이 뚜렷한 글이라 당파성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틀리면 틀리는 대로’ 욕을 먹는다. 격려보다는 비판이 많을 수밖에 없다.
- 머리말·12쪽
“글쓰기의 윤리와 두려움을 잊지 않는 필자이기를 소망한다.”
정희진, 글쓰기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말하다
정희진은 글쓰기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더 아찔한 절벽’인 글쓰기의 두려움도 말한다. 정희진에게 글쓰기는 “책임과 윤리를 동반하는 두려운 일이고 두려워해야 하는 일”이다. 글쓰기의 ‘3대 요소’는 정치학(입장), 윤리학(방법), 미학(문장력)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정희진에게 글쓰기의 핵심은 바로 ‘윤리학’이다.
나는 글쓰기의 ‘세 요소’가 정삼각형 같은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이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핵심은 윤리다. 소재에 대한 태도와 글쓰기 방식이 정치적 입장과 미학을 결정한다. …… 누가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 누구의 목소리가 큰가.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사람들이 듣기 싫은 말은 무엇인가. 사회는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이러한 권력 관계의 동학은 교육 현장, 출판 시장, 미디어 같은 구체적인 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 글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 머리말·15쪽
윤리적인 글쓰기란 무엇일까? 글쓰기에서 왜 윤리가 중요할까? 글쓰기의 윤리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정희진에게 윤리적인 글쓰기란, 타인의 이야기에 반응하고 공감함으로써 나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 나를 타인과 연결하여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반응하지 않고 ‘감정 이입’이 없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타인의 속으로 들어가야만 타인의 현실을 알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글쓰기에서 윤리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월한 자신’을 재생산하는 글쓰기, 지배와 보편 규범을 재생산하는 글쓰기가 나올 뿐이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함께 느끼고, 상대를 위해 느낀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감정 이입하는 경청은 나도 당사자가 되는 ‘엄청난’ 일이다. 감정 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나와서 여행하는 과정, 자신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다. 감정 이입을 두려워한다면 성장할 수 없다. - ‘감정 이입’·148쪽
내용 구성
1장 윤리학과 정치학은 글쓰기의 핵심이다
- 정치적 행위로서 글쓰기
1장은 글쓰기에서 윤리학(문장력)과 정치학(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이 구현되는 방식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을 모았다. 정희진이 중요하게 다루는 글쓰기 방법론인 ‘윤리적 글쓰기’와 ‘정치적 글쓰기’를 큰 줄기 삼아, 저자의 독창적 사유와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1991년 이 시를 썼을 당시 안도현은 전교조 해직 교사였다는 저자의 소개와 해석을 읽고 반전이 일어났다. 그가 옳았다. 그의 정보 덕분에 이 시는 나의 시가 되었다. 이 시의 제목이 〈너에게 묻는다〉라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
시인을 최고의 지식인으로 생각하거나 자부하는 이들이 있다. 나도 그런 축이다. 시는 언어들의 언어,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은유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시 한 줄이 사전 한 권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이 왜 잘났겠는가?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더러워진 골목길 네가 치울 거냐’·65, 66쪽
이제는 고전이 된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이나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모두 그들이 20대 중반에 쓴 작품이다. 자신이 피억압자라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 사회운동에 헌신하면서 그 과정의 분노와 열정이 걸작이 된 경우다. 글쓰기의 목적이 사회 변화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쓰기 자체가 사회를 다시 짓는 과정이다. 글쓰기의 목적은 결과에 있지 않다. 과정이 선하고 치열하면 결과도 그러하다. 글쓰기는 다른 삶을 지어내는 노동이다.
- ‘글짓기, 글쓰기’·90, 91쪽
대중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바쁜 이들은 주로 정치인과 종교인이다. 요즘은 지식인이나 사회운동가도 힐링이라는 이름의 희망을 말하는데 이건 진짜 절망적인 현상이다. 그들의 임무는 고통을 드러내고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
희망은 바라는 것이므로 어차피 현재에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희망’의 문제는 두 가지다.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맞다. 하지만 희망과 현실을 대립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이런 좌절이 오는 것 아닐까. 현실의 일부인 ‘어두운’ 현실을 드러내면 희망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 ‘희망은 욕망에 대한 그리움’·110, 111쪽
2장 당사자의 글쓰기는 혁명의 꽃이다
- 내용이자 방법으로서 윤리적 글쓰기
2장에는 여성, 장애인, 암환자, 치매 노인 등 사회적 약자의 ‘자기 현실 쓰기’, 즉 자기 위치를 자각한 당사자의 글쓰기가 지닌 힘을 보여주는 글들이 실려 있다. 정희진은 훌륭한 저작이 되려면 지식의 축적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당사자가 자기 현실을 쓰려면 공감받기 어려운, 헤쳐도 헤쳐도 계속 달려드는 칡넝쿨을 쳐내야 한다.” 통념과 상식에 도전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사회적 약자의 글쓰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장애인이나 여성이 자기 언어를 지니는 것은 지식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전복적인 행위다. 사회적 약자에게 공부는 취업, 성장 같은 당연한 의미 외에 자신의 삶과 불일치하는 기존의 인식 체계에 도전하는 무기가 된다. ……
장애인에게 공부의 의미는 이동, 관계, 투쟁…….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그 이상일 것이다. “장애인은 공부해도 어디 가서 써먹을 데가 없다.”는 생각은 현실과 정반대다. 공부야말로 사회적 약자가 해야 가장 효과적이다. 언어는 그들의/우리의 유일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 ‘장애인이 공부해서 뭐하냐’·105쪽
대중적인 글은 쉬운 글일까? 아니, 대중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대중은 균질적이거나 실체적인 집단이 아니다. 모두가 만족하는 글은 가능하지 않다. 대중적인 글을 지향하는 것은 글을 못 쓰는 첩경이다. 안 되는 일을 어떻게 되게 하겠는가. ……
익숙한 말은 진부하게 여기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말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회가 창조적인 사회가 아닐까. 사회적 약자가 경험을 드러내면 ‘사소한’ 것인데도 불안하게 느껴지고, 가진 자의 논리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회에서 인간성은 어디를 향하게 될까.
- ‘백인들의 말은 대단히 매끄럽다’·107~109쪽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글은 자기 시각은 없으나, 자기 뜻대로 쓰는 이른바 ‘객관적인’ 것들이다. 세상사를 전유(專有)하면서 스스로를 인간의 기준이라고 선포하는 글. 기회주의와 보신주의를 중립과 보편, 심지어 정론으로 포장한 것들이다. 거리를 ‘잡는 것’(포지셔닝 혹은 주제 파악)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거리 두기와 동일시는 자신을 이동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반면,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가능한 공감과 연대는 어렵다. - ‘극단적 현실’·116쪽
3장 글쓰기의 두려움과 부끄러움
- ‘세월호’에 대해 쓴다는 것
3장에서는 이 시대에 ‘세월호’에 대해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찾고자 한 저자의 치열한 고민이 담겨 있다. 정희진은 2014년 4월 16일 이후 오랫동안 자신이 쓴 거의 모든 글이 세월호에 관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잊지 않겠다.”, “그만 울자, 산 사람은 살아야지.”, “불순파 유가족, 순수파 유가족”까지 세월호를 둘러싸고 등장했던 다양한 발화를 살펴보면서 세월호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한다.
자녀의 죽음, 전쟁에서의 생존, 홀로코스트, 집단 성폭력, 지진……. 정말 신은 인간이 감당할 만한 고통만 주실까. 인간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가. 이는 어떤 조건에서만 맞는 말이다. 고난을 견디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들의 상부상조와 이를 지지하는 사회. 이것이 정의다.
- ‘이타적 인간’·180쪽
“우리가 슬픔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슬픔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 고통받는 인간은 선택받았다. 누구도 이런 선민이 되고 싶지 않겠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조건인 것을.
다만, 사회는 이들에게 “(힘이 없는데) 힘을 내라.”,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잊어라.”, “(이미 너무 참고 있는데) 참아라.”, 심지어 착취 구조에 갇힌 사회적 약자에게 “왜 그렇게 분노가 많냐.”고 분노하지 않기를 바란다. 돕고 싶다면 그들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 가장 비윤리적인 분노, 그래서 참아야 할 분노는 딱 하나, 분노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다.
- ‘우리가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193, 194쪽
눈물을 금지하는 원리는 같다. 어렸을 적 부모나 교사에게 억울하게 혼났을 때 울면 안 된다. “뭘 잘했다고 울어!” 한 대 더 얻어맞기 십상이다. 때린 사람은 우는 사람이 불편하기 마련이다. 가해자의 논리는 “(나는 가해자가 아닌데) 네가 우니까 내가 가해자가 된 것 같아 기분 나쁘다. 고로 네가 가해자.”다. 자기 행동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고 심지어 동의와 웃음을 강요한다. 아이고 사건은 눈물이 불법을 넘어 체제 위협으로 간주된 예다. 눈물=체제 위협. 눈물은 힘이 세다.
눈물은 정치적이다. 그래서 ‘아이고 사건’은 어디에나 있다. 여론이 약자에게 동정을 보일 우려가 있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걷잡을 수 없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 ‘아이고 사건’·235, 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