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내가 쓴 글이 바로 ‘나’다.”
글쓰기란, 평생에 걸쳐 자신을 알아 가는 일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의 두 번째 책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는 정희진이 읽은 64권의 책과 글을 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글쓰기는 삶이자 생계라고 담담하게 털어놓는 저자가 서가를 기웃거리고, 책상에 앉아 괴로워하며 자신을 알기 위해 치열하게 쓴 글과 글쓰기 여정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정희진은 “글쓰기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글쓰기는 ‘말하기’이고, 말하기는 곧 ‘사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평생에 걸쳐 자신을 알아 가는 일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기 내부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앎의 이유와 목표는 자신을, 우리 자신을 아는 데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가 아는 지식을, 내가 쓴 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는 ‘나’를 알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탐구로 바뀌어야 한다. ……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 머리말·13, 14쪽
“‘내가 먹는 것이 나다’,
‘내가 행하는 것이 나다’라는 진리처럼
나는 ‘글은 곧 글쓴이다’라고 생각한다.
아니, 글만큼 그 사람 자체인 것도 없다.”
정희진은 《침묵의 세계》에 관해 쓰면서 침묵이란 자기와 나누는 대화이며, 자신과의 만남이 존재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근대초극론》을 읽으며 약자의 자기 찾기는 비서구, 여성, 장애인 등 나를 만든 이들을 모두 거쳐야 하는 멀고 복잡한 과정임을 떠올린다. 《제2의 성》을 읽으면서 여성주의란, ‘인간’과 ‘인간의 여자’로 나누는 권력에 대해 질문하는 인식론임을 깨닫는다. 프랑스혁명기의 페미니스트 올랭프 드 구주의 전기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에서는 위대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역사는 ‘없는 역사’이며, ‘있었다’는 결국 ‘없었다’는 뜻임을 깨닫는다.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쓰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신문 기사든, 모두 그 글을 쓴 사람의 이야기다. ……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 ‘심리적 허기’·246, 247쪽
“살아내는 대로 쓴다”
‘나’에게 돌아오는 글쓰기
글을 쓰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흔히 하는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다. 이 질문에 대한 정희진의 답은 ‘살아내는 대로 쓴다’이다. 이는 ‘몸으로 쓴다’는 표현과 가장 가깝다. 그에게 ‘몸으로 쓰는 글쓰기’란, 자신이 겪은 경험과 이야기를 자기만의 언어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를 알기 위해 쓴다》에는 정희진이 읽고 만난, 자신에 대한 의문 속으로 뛰어들어 글을 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글쓰기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뇌성마비 장애 여성운동가 해릴린 루소, 생사를 넘나드는 우울증 경험을 씀으로써 고통받는 몸에 대한 새로운 사유로 나아간 작가 엘리자베스 워첼, 인종주의·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뚱뚱한 흑인 여성이 겪는 일상에 관해 기록한 작가 록산 게이, 쓴다는 것에 대한 막막함과 아득함, 그리고 그 고통이 글쓴이에게 오히려 위안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소설가 정찬…….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한국 사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는 선호될 수밖에 없다. 생각은 엄청난 노동이기 때문이다.
자기 모순은 언어를 빼앗긴 이들의 운명이다. 이것이 지배와 피지배 관계의 핵심이다. 강자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하지만 약자의 삶과 언어는 불일치한다.
-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165쪽
우리 사회에는 장애, 성별, 이성애 제도에 대한 지식이 없다. 나는 ‘정상인’들의 무지가 차별의 엔진이라고 생각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매번 대응할 수도 없고, 교정을 요구할 수도 없는 고단한 삶이다. 무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쓰기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의 자기 재현이다.
- ‘무지는 어떻게 나댐이 되었나’·178, 179쪽
‘여성주의’와 글쓰기
저자는 이 책에서 ‘여성주의’를 틀로 삼아 기존의 인식 체계를 질문하는 ‘여성주의 글쓰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정희진은 “내게 ‘여성’은 고통이자 자원”이라고 말한다. 여성에 관해서, 여성의 삶에 관해서 쓴다는 것은 때로는 그를 자기 혐오와 연민, 피해의식, 분노로 가득 차게 한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여성에 관해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아는 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타인에게 어떻게 설득할까.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봐 경미한 사례만 간략하게 인용하고 분석에 집중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과장이 심하다.”, “〈주부생활〉 표절한 거 아니냐.”는 독후감을 말할 때 두 번째 좌절이 왔다. “어머니가 맞고 사시냐.”, “매 맞는 남편도 있다.”, “폭력 가정은 극소수다.”처럼 여기 다 적을 수 없는 내용이 세 번째 좌절이다. 왜 여성의 경험을, 말을, 생각을 믿지 않을까.
- ‘임신 중 구타가 유아 사망의 주원인’·212쪽
단도직입적으로 여성주의만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학문은 드물다. 아니, 글쓰기와 여성학의 인식론, 방법론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이고, 여성주의는 언어의 역사가 형성된 과정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개입된 권력 관계를 질문한다면, 기존 여성주의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상대화와 붕괴(의미의 다변화)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주의와 글쓰기 공부는 별개의 실천이 될 수 없다. - 머리말·15, 16쪽
내용 구성
1장 몸에서 글이 나온다
- ‘나’에게 돌아오는 글쓰기
1장은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에 관한 정희진식 글쓰기 방법론을 보여준다. 정희진에 따르면, 좋은 글쓰기란 통념과 상식, 기성의 것과 상투성에 머물지 않고 텍스트를 나만의 것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 과정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나’에게 돌아오는 글쓰기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물음은 내 경험과 사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을 때, 타인이 멋대로 나를 규정할 때 솟아난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넌 누구냐?”라는 심문(審問)에 대한 일차적 반응이다. ……
저자가 일관되게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피억압자의 삶을 내내 뒤덮고 있는 신문(訊問)의 정치라는 사실이다. ‘여성’, ‘아줌마’,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아닌 사람, 식민지 사람은 이중 메시지 상황에서 늘 자기를 설명하라는 요구에 시달린다.
-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저들’·25, 26쪽
유럽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가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서구가 비서구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서구를 열심히 연구하다 보면 질문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나를 알려면 나를 만든 이들을 거쳐야 한다. 비서구, 여성, 장애인……. 모든 타자들에게 인생이란 이렇게 멀고 복잡한 우회로이다. 이는 피식민자의 자기 찾기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해준다. - ‘끝을 보고야 만 자의 씁쓸함’·38쪽
진저리는 몸이 해체되기 시작할 때 뼈와 근육 간의 연결이 이탈되기 전 단계의 몸이다. 진저리의 최후는 몸과 영혼의 분리, 죽음이다. 진저리치는 글을 쓰는 작가는 여러 번 죽었다 깨어난다. …… 독자 역시 최소한의 비슷한 경험, 진저리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들이 여성학 책을 읽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다. - ‘진저리를 쳤다’·59쪽
2장 우리는 타인을 위해 산다
- ‘너’를 만나는 글쓰기
2장은 ‘타인을 만나는 글쓰기’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글을 모았다. 저자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자기 변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의 절정은 성별, 계급, 나이, 심지어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 상호 성장을 위해 자기가 알던 유일한 세계를 포기하는 순간”에 있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유의 시작이다.
호소하고 싶은 사연, 모순된 자기 행동을 이해받고 싶은 마음, 몸에서 말을 내보내야만 생존이 가능한 상태를 수치심과 상대방에게 판단당하는 걱정에 시달리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얼마나 될까. 내가 택한 안전한 관계는 나 자신과의 대화인데, 이 방법은 정신이 분열될 위험이 있다. 혹은 신이나 절대자와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결국은 자신과의 대화다. 우리에겐 타인이 필요하다. 타인과의 상호 작용은 소중한 차원을 넘어 존재 양식과 생사의 문제다.
- ‘안전한 관계’·109쪽
나의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 아무리 세게 부딪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벽, 나도 믿기 어려운 경험을 당연한 듯 믿어주는 사람, 내 안의 고통을 비워줄 수 있는 사람. ‘진정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필요한 시간이 있다. 이 사랑은 말을 들어주는 것이 첫째다. 상대방의 경험에 대한 수용력, 호기심을 품지 않는 예의, 취약한 상대방을 조종하거나 동정하지 않는 사랑. 깊고 신중한 배려 속에 나를 넣어주는 사랑이다. - ‘사랑은 말하고 싶음, 말할 수 있음이다’·124쪽
자신을 버리고 언제나 상대방이 되는 삶. 바울은 ‘주인, 이스라엘인, 남자’가 되기를 버리고 ‘여자와 노예’가 되기로 하지만 실패한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타인이 되고자 해도 진정 타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요지는, 바울의 제안이다. 타인이 됨으로써 약자의 저항과 융합을 강조하는, 공동체의 윤리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내가 타인이 되고자 함은 ‘복음’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서이다. 타인을 수용하고 온전히 이해하고 이해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변형될까. - ‘될 수 없는 자’·169쪽
3장 내게 ‘여성’은 고통이자 자원이다
- 창의적 글쓰기의 가능성
3장은 ‘여성주의 글쓰기’란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들을 모았다. ‘#나는_잠재적_가해자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 ‘남성 페미니스트’의 등장, ‘가스라이팅’ 폭력 등 한국 사회의 젠더 관련 이슈를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다시 쓴다. 성차별과 여성 혐오, 데이트 폭력과 살인(femicide)이 일상인 현실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분노와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여성에 대해 쓴다는 것은 여성, 여성의 경험,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해 상상력이 없는 이 세계에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헬렌 켈러를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도로시 허먼의 《헬렌 켈러》를 읽으면서 위인전에는 어떤 종류의 ‘19금’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했다. …… 위대한 인물은 부정의한 사회와 투쟁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헬렌 켈러가 헌신했던 사회운동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고, 주류 사회가 인정한 성취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일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렇게 박제된 인식에 대한 교정이자 도전에 있다. 3중 장애 여성은 공산주의자, 페미니스트이면 안 되나? 박제는 생각보다 무서운 말이다. ‘박(剝)’은 벗기다, 깎다, 찢다라는 뜻. 그러니까 아예 다르게 만들어버리겠다는 의지다.
-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193, 194쪽
사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사건은 “나도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라는 ‘운동’이다. 잠재적 가해자라니?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면, 여성의 현실적, 현재적, 일상적 피해는 누가 저지른 일이란 말인가. 물론 ‘선의’겠지만 무지에서 나온 선의는 지배 세력의 관용과 성찰로 둔갑하기 쉽다. 사회적 모순에 ‘잠재’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빈부 격차를 ‘잠재적’이라고 하는가? 지역 차별, 장애인 차별도 일상적이고 노골적이지 잠재되어 있지 않다. 성차별은 더욱 그렇다. 따라서 “나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는 “나는 성차별 구조에서 가해자의 위치에 있습니다.”로 바꿔야 한다.
- ‘잠재적 가해자?’·218, 219쪽
여성의 처지는 같지 않다. 수많은 차이가 있다. 계급, 인종, 나이, 성 정체성, 지역, 장애……. 이것은 단순한 다름이 아니라 적대적 모순 관계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여성으로 일반화해버릴 수 있는 권력이 가부장제다. …… 여성이라는 ‘작은’ 공통분모 하나 때문에 일상과 목숨을 잃는 세상에서, 여성은 일시적으로 “너는 나다.”라는 정체성의 정치를 주장한다. 여성의 저항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사회 정의다. 이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면 여성의 복종으로 성립되어 온 가부장제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 ‘네가 나야’·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