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동아시아 사상의 거의 모든 것 - 상황을 읽고 변화를 만드는 힘과 지혜
동아시아의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 세
“세勢를 아십니까?” 이 질문에 당신은 무엇이라고 답할까. 권세, 대세, 판세, 기세, 정세…. ‘세’가 쓰인 무수히 많은 단어들이 생각나면서도 명확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알듯하면서도 정리하여 말하기는 어려운 개념, 하지만 일상에서 분명히 자주 사용하는 개념 ‘세’. 이 책은 최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젊은 동양철학자로 왕성한 집필 활동 중인 저자 임건순이 ‘세’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동양 고전을 두루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 동아시아인의 삶과 세계관에 시사하는 바를 정리한 것이다.
‘세’는 기미와 잠재력을 포함한 조건과 상황이라는 외부 환경을 읽고 인간의 생명력과 정신력을 최대로 끌어내 주도권과 권위를 확보하는 행위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동양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손자병법》부터 불후의 미학 이론을 담고 있는 《구세》까지, 정치철학을 시작으로 풍수지리에 이르기까지, 문학?서예?그림과 《주역》 64괘를 아우르는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상선약수上善若水’, ‘상옥추제上屋抽梯’ 등 익숙한 고사성어에 대한 색다른 뜻풀이와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이 책은 동아시아의 철학과 미학의 본질에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게 좋은 길잡이이자 재미있는 비급??이다. 저자는 《한비자》, 《도덕경》, 《맹자》 등의 고전뿐 아니라 예술과 무술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 ‘세’를 살핀다.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은 친절한 예시와 서술로 철학과 미학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정신세계 전반의 핵심을 개괄한다.
손자, 한비자, 맹자, 노자…, 거장들이 천착한 화두
앞서 보았듯 ‘세’가 쓰인 단어가 많은 이유는 그만큼 인간의 삶 속에서 그 개념을 자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자, 한비자, 맹자, 노자 등 동아시아 사상의 거두들은 ‘세’라는 개념에 천착해왔다. ‘세’에 대한 인식은 동아시아 철학의 근원이자 시초인 병가로부터 시작됐다. 《손자병법》에서는 “무한한 변화”를 파악하고 이에 조응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외부 상황을 파악하고 만들어내 “싸우지 않고 이기는” 최고의 경지, 이른바 선전자의 부전승을 추구하기 위해 ‘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적극 계승한 것이 법가였다. 《한비자》에서는 ‘전쟁의 연장인 정치’에서 생존하려면 법과 규칙을 통해 체계를 세워야 하며, 이를 통해 권세가 형성되면 평범한 능력의 사람도 나라를 통치할 수 있고 세상이 편안하다고 했다. 세를 장악할 때 비로소 국가를 건설하고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명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유가는 이러한 세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따르려 하지 않았다. 《맹자》에서는 세상에서 인정받는 세 가지로 세, 나이, 덕이 있지만, 세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호연지기를 기를 것을 당부했다. 흐름을 읽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주체성을 포기하고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니 중요하지만 잊어버려야 할 개념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달리 노자에게 있어서 ‘세’란, 《도덕경》이 추구하는 ‘도’가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목표였다. 그래서 노자는 하늘과 땅처럼 장구하게 생존을 추구하기 위한, 세를 얻기 위한 수많은 방법을 경구로 제시했다. 사회 속 생존의 방법, 인간과 세계의 관계, 올바른 국가와 정치의 모습, 주체성과 외부 환경의 조화를 성취하는 방법 등 동아시아 철학의 핵심 화두들이 모두 ‘세’를 살피는 속에서 이야기된다. ‘세’가 병가, 법가, 유가, 노자사상을 아우르는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으로 진입하기 위해 알아야 할 핵심 개념인 이유다.
변화의 철학, 생명의 미학
정신적인 측면을 포함한 인간과 세계의 조건과 상황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것을 ‘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라고 할 때, 핵심은 ‘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동아시아에서 역사의 주역을 영웅이 아닌 전략가로 보고 ‘환호와 칭찬이 없는 승리’를 추구하는 데에는 조건의 변화를 지배하는 통찰력에 관심이 큰 동아시아인의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에 대한 탐구는 곧 변화의 철학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변화에 대한 통찰과 철학은 아름다움과 편안함에 대한 인식, 동양 미학으로 곧바로 이어졌다. 동아시아인의 삶과 생명의 풍요로움에 대한 인식은 시?서?화의 예술을 통해 표현되었고 풍수지리? 《주역》점괘 등을 통해 생활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반영됐다. 위대한 미학 이론서 《구세》에서 서예를 통해 언급했듯, 사태의 흐름을 끊지 않고 변화를 긍정하면서 자연스럽지 못한 개입을 걷어내고 함축을 통해 핵심을 짚는 것에서 이른바 ‘용’의 무쌍한 에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추구한 것이 동아시아의 미학이다. 최종적인 완성을 부정하고 늘 다시 시작하는 창조적 생명력이 곧 미학적 ‘아름다움’이며 철학적 ‘올바름’이다. 동아시아 특유의 철학과 미학을 통합한 세계관은 ‘세’에서 정확히 구현된다.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저자가 미학까지 공부하면서 이 개념에 천착한 까닭이다.
득세의 힘, 취세의 지혜로 만드는 주체적인 삶
조건을 살피고 이에 맞춰 자신의 삶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자칫 ‘단순한 명철보신明哲保身’으로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세를 얻고(得勢), 세를 취하는(取勢)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객관적인 상황을 정확히 타산하고, 이를 변화시켜 자신의 조건을 바꾸어 결국 자신의 삶과 운명을 바꾸는 것이 세를 지배하는 삶이다. 타산 없는 주관적 욕망과 패기 없는 현실 타협의 양극단을 배제하고 득세, 취세를 통해 혁명적 변화를 만드는 주체적인 삶이 세의 본질을 이해한 이의 세계관이고 ‘진정한 명철보신’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여러 가지로 오해받아온 동아시아의 전통적 세계관과 지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