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기담 : 순한맛
읻다가 준비한 한여름 오마카세 소설
《여름기담 매운맛》, 《여름기담 순한맛》 전 2권 출시!
취급은 취향껏, 개봉 후 서늘한 응달에서 읽으세요
열대야와 장마의 계절 여름, 이름 모를 불안감과 지루함에 뒤척이는 당신을 위해 8인의 작가가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놓는다. 심연의 공포와 불안을 끄집어내는 《여름기담: 매운맛》 네 편, 겁이 많은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기기묘묘하고 엉뚱한 《여름기담: 순한맛》 네 편이 각각 ㅤㅇㅣㄷ다에서 출간되었다. 자극적인 요소를 넣지 않고도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깊은 여운을 선사할, 부드럽지만 충분히 서늘한 ‘순한맛’ 소설 네 편을 소개한다.
“부디 화분들만은 죽이지 말아주세요.”
〈초록 비가 내리는 집〉
가끔 속이 상할 때면 그런 상상을 해봐. 선생님을 따라 교장 모임에 나갔다가 선생님의 실체를 죄 폭로하는 상상. 우리 선생님은 배운 분답게 여편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시지만, 내가 어쩌다 밥이라도 태우면 어린 계집애 다루듯 회초리로 제 종아리를 찰싹찰싹 때린답니다!
—12쪽, 〈초록 비가 내리는 집〉 중에서
《자두》에서 《누의 자리》까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자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재구성해왔던 이주혜 작가는 〈초록 비가 내리는 집〉에서도 그 고민을 이어나간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주인공 ‘양순덕’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다름 아닌 키우던 화분을 정리하는 일이다. “그게 부부 생활이냐, 종살이지”라는 간편한 요약이 보여주듯 손현자의 삶은 실상 “손찌검만 없었지 얄미운 말본새”와 불임의 원인을 아내의 탓으로 돌린 남편의 이기심으로 점철되어 있다. 여생을 정리하며 남편에게 남긴 단 한 문장 “부디 화분들만은 죽이지 말아주세요”는 이 같은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소설을 감싸고 있는 초록 식물들을 광휘 아래라면, ‘아내’인 나는 당신이 죽였어도, 그 자리에 놓인 ‘식물’만큼은 당신이 죽일 수 없을 것이라고. 밑동만 남았을지라도 그 아래는 뿌리로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식물처럼 모종의 결속감이 ‘양순덕’의 삶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마치 무서운 건 귀신과 같은 미지의 존재가 아니라, 너무나 익숙해서 그 존재에 대한 의심을 거두어버리는 일이 아니겠냐고, 대신 결락된 그 자리에 식물의 상상력을 겹쳐둘 것을 제안하는 이 소설을 통해 ‘공포’가 주는 익숙함을 한 겹 벗긴 채 여름기담의 문을 열어본다.
“뭐로 변했다고?” “고양이.”
〈아직은 고양이〉
“저번에는 〈동물농장〉을 보다가 내가 다음 생에는 고양이로 태어나야지 했거든. 고양이가 편한 것 같아서, 라고 하니까 뭐라고 한 줄 알아?”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수진은 말을 이어갔다. “은재가 한숨을 푹 쉬더니 고양이도 사는 거 힘들어, 라고 하는 거야. 이상하지? 자기가 마치 고양이로 살아본 것처럼.”
—55쪽, 〈아직은 고양이〉 중에서
카프카의 〈변신〉이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과 그에 냉담한 주변 사람들을 통해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현대 사회의 모습을 포착했다면, 정선임 작가의 〈아직은 고양이〉는 고양이로 변해버린 남자친구를 찾으러 다니는 ‘수진’과 그 커플을 목도하는 ‘나’의 일상을 통해 고양이를 태하는 도시의 세밀화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목련나무 앞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나’는 우연히 학창시절 친구 ‘수진’과 그의 남자친구 ‘은재’를 만난다. 수진은 은재가 고양이라 확신하며, 어느 날 고양이가 되어 사라져버린 은재를 찾아줄 것을 ‘나’에게 부탁한다. 고양이가 된 은재를 찾으러 다니는 ‘나’와 수진은 도시의 가장 낮은 곳을 살피며 은근한 혐오를 마주한다. 가령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마십시오”라고 적힌 팻말을 보는 일 같은 것들. 은재를 잡으러 다니다 우연히 마주친 타로마스터는 이들에게 뜻밖의 묘수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의 미덕은 타인을 위한 낯선 여정을 따라가며 익숙한 도시의 풍경을 다채롭게 감각하는 것이다. ‘나’가 고양이 먹이 금지라는 팻말을 마주했을 때 그 종이를 가뿐하게 무시하고 은재를 찾아나서는 것처럼 〈아직은 고양이〉는 무엇보다 타인의 자리를 상상하고 먼저 가서 닦아두는 일을 담박하게 묘사한다.
“또다. 또 나타났다.”
〈우산이 나타났다〉
7월 초부터 시작된 장마는 끈질기게 비를 흩뿌렸다. 날이 개어 장마가 끝났나 싶으면 다음 날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망가진 우산은, 비가 오는 날에만 유빈의 현관 앞에 나타났다.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우산들.
—96쪽, 〈우산이 나타났다〉 중에서
우리가 비 오는 풍경을 보고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우산 안 들고 왔는데...’ 아닐까. 그런데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산이 나타나는 것도 꽤 곤란하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에서 우산의 등장은 인생의 희비극을 점지하는 순간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장마가 시작되던 날, ‘나’는 홀린 듯 골목길에 놓인 짚 우산을 발견한다. 물건을 고치는 상점에서 일하는 나는 재능을 발휘해 짚에 뚫린 구멍을 고치는데, 그 순간 ‘나’는 딸 ‘콩’을 돌보지 못하고 ‘콩’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만다. 이후 ‘나’는 자신이 일하는 상점에서 우연히 도롱이 전설을 듣게 되고, 아이의 고통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 아닌지 의심한다.
많은 기담들은 비 오는 날을 배경으로 하곤 한다. 비는 온도가 내려간 날의 서늘함,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구도 나를 구해줄 수 없음을 표기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내리쬐는 순간을 더욱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범유진 작가가 만든 세계도 마찬가지다. ‘나’가 일하는 곳은 추억 ‘수리’점이고, ‘나’의 딸 역시 우산의 재등장과 함께 회복된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라면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고통도 추억도 회복될 수 있다는 소설의 중핵을 마주할 수 있다.
“자네는 직장인의 타임루프에 빠졌다네”
〈디 워〉
“에어컨이 고장 났을 때 보는 영화는?” [...] “〈디 워〉잖아요.” 내가 말했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어제 했나?” 그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인중을 긁적였다. “그날이 그날 같아서.”
—170쪽, 〈디 워〉 중에서
직장생활은 상사의 반복되는 농담에 적당히 반응하고,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는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일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일상, 나아지지도 나아가지도 않는 삶에서 ‘나’는 ‘직장인의 타임루프’에 걸린다. 일상적인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해 온 주인공이 타임루프에 걸렸다는 사실은 ‘반성 없는 관성’을 지적하는 것 같아, 왠지 뼈아프다. 그러니 타임루프를 풀기 위한 자연스러운 수순은 “평소와 다른 행동”일 수밖에 없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회사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은 이 소설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내면의 고요한 열망을 힘 있게 뱉어내는 순간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대신 반찬과 함께 삼키는 우리에게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공포소설이라고 호명할 수 있는 까닭은 〈디 워〉가 주인공의 ‘속 시원한 퇴사기’가 아니라, 퇴사는 “못 들은 걸로” 하는, 내일도 오늘과 같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리라는 지리멸렬한 실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을 일상적으로 대했을 때에서 오는 사건을 통과한 후 “내 알 바 아니었다”로 마무리되는 주인공의 내면적 전회를 목도한 후라면, 어쩐지 조금 더 단호한 마음으로 나를 지킬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