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을 만난 세계 -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김순석 최정환 이덕인 박흥수
정태수 최옥란 박기연 우동민……
한평생 ‘변방의 존재’로 머물다 간 이들,
그죽음의 순간조차 불평등했던 이들,
그러나 그 불평등마저 저항으로 벼려낸 이들
장애해방열사가 산 자들의 ‘이 세계’에 남긴 것
한 장의 유서가 촉발한 저항: 김순석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
장애자들은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대우를 받아도 끝내는 이용당합니다. 조그마한 꿈이라도 이뤄보려고 애써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저를 약해지게만 만듭니다.”
—《조선일보》(1984. 9. 22)에 실린 김순석의 유서
1984년, 염보현 당시 서울시장 앞으로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순석(1952~1984. 9. 19). 김순석의 죽음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라는 인식이 대두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항거로 평가받는다. 어려서 겪은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던 그는 1980년에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심한 장애를 입게 되었다. 그래도 세공 기술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액세서리를 만들고 팔며 꿋꿋이 생계를 이어갔고,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번번이 도로의 턱에 가로막혀 운신조차 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삶을 꾹꾹 눌러 담은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1984년 9월 22일의 일이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친목 위주의 단체였던 대학정립단 소속 학생들(주로 소아마비장애인들)을 행동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그가 생을 마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0월 6일 장애인 복지시설 정립회관 운동장에서 열린 제8회 전국지체부자유 학생체전 개회식에 김순석의 모조관을 들이고 그의 사정이 적힌 유인물을 배포했다. 장애인을 위하는 척하는 겉치레용 행사만 열지 말고, 그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당시 이 행사에는 문교부 장관, 서울시 교육감, 국회의원, 보건사회부 사회국장 등이 내빈으로 참석해 있었다.
김순석 열사의 유령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출몰한다.
시작이 된 죽음: 최정환, 이덕인
“복수해달라,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 죽어도 좋다.”
—최정환
장애인의 자립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1980년대, 장애인이 노동을 통해 먹고살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노점이 유일했다. 기술을 익히기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은 거리로 나와 양말, 라이터, 휴지, 껌 등 간단한 공산품들을 팔아 하루 먹고살 만큼의 수입을 거두곤 했다. 스물한 살 때 당한 교통사고로 하반신마비를 입은 최정환(1958. 6. 30~1995. 3. 21)도 그중 하나였다. 수세미를 팔다 카세트 노점으로 종목을 바꾼 그는 양재역 부근에서 쏠쏠한 수입을 얻으며 호시절을 맞는다.
그러나 정부의 노점상 탄압은 그를 사지로 내몬다. 1994년 여름 단속을 당하는 과정에서 왼쪽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그는 생계에 치명타를 입게 된다.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그에게 서초구청 측은 ‘고소하지 않으면 이제 편하게 장사하도록 해주겠다’며 합의를 종용했지만, 끝내 그 약속을 저버렸다. 1995년 3월 8일, 단속반원들에게 장사 밑천인 스피커와 배터리를 또다시 빼앗긴 그는 그 물건들을 되찾고자 찾아간 구청에서 멸시 어린 시선을 받고 쫓겨난다. 그날 저녁 최정환은 시너 1리터를 자신의 몸에 쏟아붓고 불을 붙인다. 온몸에 극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21일 새벽 끝내 숨을 거둔다. 최정환의 죽음은 “복수해달라,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계획대로라면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영결식을 하고, 서울시청과 서초구청에서 노제를 한 후에 용인에 위치한 천주교 공원묘역으로 향해야 했지만, 그마저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가면서 어그러진다. 최정환 시신이 경찰 손에 넘어갔던 배경에는 당시 장례투쟁에 함께했던 일부 장애인단체의 ‘배신’이 있었다. 3월 25일, 결국 시신 없이 영결식이 치러진다. 경찰은 영결식을 마치고 가두 진출을 시도하는 이들을 곤봉으로 내리쳤고, 현장은 순식간에 수백 개의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지뢰밭이 되었다. 연대 앞, 서울시청 삼거리, 강남시립병원 앞에서 사람들은 최정환이 부탁한 ‘복수’를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그렇게 열사의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을 만들어냈다.
최정환 열사 투쟁이 있은 지 수개월 만인 11월 28일에는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1967. 12. 14 ~ 1995. 11. 28)이 아암도 망루투쟁 중 의문사하는 일이 발생한다. 경찰의 눈을 피해 망루 밑으로 내려가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사흘 뒤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경찰은 그의 시신을 탈취하려고 했고, 시민들은 이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경찰은 끝내 시신을 탈취해 자신들 마음대로 부검을 진행하고는 사인 역시 ‘익사’로 일방 처리해버린다. 1996년 4월 24일, 이덕인의 장례는 결국 그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지 못한 채 치러졌고, 2021년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규명 없이 ‘의문사’로 계류 중이다.
‘변방’이 세계와 접할 때: 박흥수, 정태수
“유언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듣는 자’가 있을 때에야 세상에 ‘존재하는 말’로 남는다. 최정환의 유언을 읽어낸 사람들은 필사적이었다. 이 죽음은 박흥수, 정태수를 조직했다.”(61)
박흥수(1958. 5. 15~2001. 7. 23)는 장애인 노점 확보를 혁명의 한 과정으로 생각한 이였다. 1995년 청계천 노상에서 한동안 씨티폰 등을 팔았던 그는 자기 장사보다 다른 노점들 확보투쟁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가 당시 이 투쟁에 제 모든 것을 건 것처럼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본에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는 장애인들이 그 지배 시스템 안으로 어떻게든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 그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 사실상 무임금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던 운동가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비루한 자들의 혁명은 환영받지 못했다.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이름표를 달고 출범한 정권 5년 동안에만 3만 5039개의 노점상이 강제로 철거당하고, 5662개의 손수레가 파괴될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용역을 대동한 단속반이 수시로 들이닥쳐 좌판은 엉망이 되었고, 폭력과, 욕설, 고성이 난무했다. “박흥수는 언제나 이 싸움의 선봉에 서 있었다. 딱히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선동가도 아니었고, 정제된 사상으로 무장된 이론가도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곁에 선 동지들을 전선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꽤 오랜 시간 동료들과 투쟁을 연습해왔던 박흥수는 준비된 운동가였다. 그 시작은 1989년 서울장애인복지관 직업훈련과정 동문회 ‘싹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박경석(현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정태수와 함께 팔뚝질과 구호 제창을 연습하며 양대 법안(장애인고용촉진법·장애인복지법) 제·개정 촉진을 외치는 투쟁 현장에 나갈 채비를 했다. 데모를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운동권 대학생들에 뒤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싹틈이 운동의 역량을 다질 수 있었던 데는 박흥수의 역할이 컸다. 1989년 봄 박흥수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기술을 익혀도 취업을 하지 못하거나 취업하더라도 저임금과 차별에 시달리는 직업훈련과정 학생들의 현실에 대해 복지관 측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다. 그 과정에서 복지관 측과 마찰이 일자 그는 학생 23명을 조직해 복지관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한다. 5일간 지속된 농성 끝에 복지관은 결국 학생들의 요구 조건 일부를 수용한다. 한편으로는 ‘미흡한 게 많은 투쟁’이었지만, 이 투쟁을 계기로 박흥수, 정태수, 박경석은 ‘싹틈 출신 3인방 운동가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박흥수는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장청)와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장한협)가 통합하여 출범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전장협)의 부회장과 서울지부장을 역임한다. 그러나 박흥수는 대부분 대학을 나온 전장협의 다른 핵심 구성원들 사이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스스로가 ‘변방의 존재’라는 것을 더욱더 절실히 새기게 된다. 그런 그를 일깨운 것은 최정환의 분신으로 인해 촉발된 투쟁이었다. 그는 최정환 투쟁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타 단체들과의 회의에 전장협 대표로 참석해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박흥수는 이 투쟁을 거치며 장애인들이 새로운 싸움에 나설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다. 1994년 최정환의 죽음은 장애인들의 생존권 문제와 활동가들의 생계 문제를 고심하던 그에게 ‘장애인 노점’이 갖는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1995년 박흥수는 전장협 내부에 노점 분과를 개설했고, 전국노점상연합회와 함께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를 창립함으로써 노점 확보투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그렇게 박흥수는 자신이 거주하던 변방을 하나의 세계로 구축해냈고, 그 세계를 점차 세상 밖으로 확장해나갔다.
1989년 서울장애인복지관에서 박흥수와 함께 농성을 조직했던 정태수(1967. 11. 6~2002. 3. 3) 역시 자신만의 스타일을 벼리며 운동의 꿈을 키워갔다. 세계를 변방의 힘으로 물들였다. 복지관 시절 당시부터 정태수는 강경파 운동 세력이었다. 그는 선배 박흥수의 이야기를 스펀지처럼 흡수했고, 박흥수 역시 그런 그를 애지중지했다.
1991년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의 활동가가 되어 본격적으로 장애인운동에 뛰어든 정태수는 열정적으로 세상을 배우고 싶어 했다. 누구든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양쪽 모두 목발을 짚고선 직접 찾아다녔다. 당시 장청이 밀고 있던 중요한 계획 중 하나는 장애대중을 조직하기 위한 공간으로 야학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1993년 8월 노들장애인야학이 문을 열었고, 장청과 장한협이 통합되어 전장협이 출범했다. 정태수는 장청과 전장협 모두에서 조직국을 맡아 활동했다. 조직이란 사람들을 만나 단체의 지향을 공유하고, 그들을 얽어 단체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물리적인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그에게 제격인 직책이었다. 그는 대중들이 스스로 참여하지 않는 운동·조직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었다.
정태수의 동료들은 그에 대한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장애인 고용촉진 걷기대회’를 꼽는다. 1996년에 열린 이 대회는 13박 15일 동안 제주에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를 거치는 순회투쟁으로,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서울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집회로 대미를 장식하는 일정이었다. 이 대회를 조직한 정태수의 노동권에 대한 열의와 조직화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교육, 의료, 직업재활 등 모든 장애문제가 결국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닌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로 세우는 방향으로 재조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지향이 담긴 걷기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수십 차례 전국을 돌고, 숙박비를 아끼려 차에서 잠을 자곤 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고 다니며 무려 1500명의 대중을 조직해낸 그였다.
“노점 자리 하나를 얻기 위해 이슬을 맞으며 밤새 그 자리를 지켜야 했듯이, 한 사람을 거리에 세우기 위해 그는 밤새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루어낼 도리가 없는 일이 바로 ‘조직’이다.”(207)
미리 쓰여진 유서: 최옥란
1988년 서울올림픽과 함께 열린 88장애자올림픽에 대한 거부투쟁과 양대 법안 제·개정을 둘러싼 싸움으로 확산된 장애인 대중운동은 운동과 이렇다 할 접점이 없던 새로운 사람들을 조직할 수 있는 힘을 마련해주었다. 최옥란(1966. 7. 3~2002. 3. 26)은 바로 그 변화의 물결 한가운데에 있던 이였다. 특히 1988년 4월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장애인 권익촉진 생존권 범국민 결의대회’는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다. 그는 이 투쟁을 시작으로 장애자올림픽 거부투쟁과 양대 법안 쟁취투쟁에 가세한다. 이후 11월 19일 최옥란은 정태수 등 7인과 함께 양대 법안 쟁취와 장애인 의무고용률 하향 조정 철회를 요구하며 공화당사 강당을 점거하고 열흘간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장애인 뇌성마비를 위한 새로운 언어와 투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뇌성마비연구회 ‘바롬’의 창립에 함께한 최옥란은 1993년 결혼 이후 이전처럼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워진다. 그는 결혼생활을 통해 사랑하는 아들을 얻지만, 이내 이혼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양육권이 경제적인 능력이 있고 상대적으로 경증의 장애를 가진 남편과 시부모의 손에 넘어간다. 양육권 소송을 벌인 끝에 재판에서 약간의 면접시간을 인정받지만 이는 최옥란에게 충분치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아들 준호와 함께 살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을 인생의 중대 목표로 삼는다. 돈을 벌 수 있는 방편으로 노점을 택하지만 노점은 잘되지 않았고, 단속과의 전쟁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2000년 10월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기초법)은 최옥란이 노점상을 포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흔히 ‘김대중 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소환되곤 하는 기초법은 이전의 생활보호법과 달리 나이나 장애 유무와 무관하게 수급 자격을 부여한다는 취지와 달리, 최저생계비를 턱없이 낮게 책정했다. 심지어 현실에서는 수급에서 탈락했다는 이들의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을 접한 최옥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싸우고 싶다며 의욕을 보였고, 주변 단체들에 연대를 요청하고 참가를 조직했다. 결국 무기한이 아닌 7일간의 농성을 진행한다는 결정 끝에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단’이 2001년 12월 3일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 돌입 기자회견을 열었다.
농성단은 당시 최옥란이 받던 수급비 28만 6000원을 근거로 너무 낮은 최저생계비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반드시 지출해야 하는 전기세, 수도세나 병원 의료비만 합해도 한 달에 최소 41만 원이 필요했기에, 이런저런 생활비까지 합하면 매달 30만 원 이상의 적자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적자를 메우기 위해 간헐적으로나마 노점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당시는 이미 이웃 상인의 신고로 주민센터에 노점 운영 사실이 발각되어 수급권을 박탈한다는 통보를 받은 뒤였다. 수급자는 한 푼도 벌어선 안 됐다.
농성은 3일 차의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투쟁대회’, 5일 차의 수급비 28만 6000원을 직접 반납하기 위한 김원길 보건복지부 장관 자택 방문 등을 거쳐 마지막 날인 12월 10일 ‘지역별·가구 유형별 최저생계 도입을 위한 헌법소송 기자회견’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약 두 달 후인 2002년 2월 21일 새벽, 최옥란은 음독을 시도하고 병원으로 후송된다. 기력을 찾는 듯했던 그는 3월 26일 끝내 숨을 거뒀다.
이 책의 표지에 고스란히 실린 최옥란의 유서는 동료들과 ‘사랑하는 아들’ 준호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나의 주위에 계시는 동료 여러분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꼭 이어주십시오.” “준호야 사랑한다. 꼭 너하고 살려고 했는데. 준호야 준호야 네가 보고 싶구나.” 그는 죽기 한 해 전부터 이미 자신의 유서를 작성해두고 있었다. 총 네 통의 유서 중 마지막으로 작성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께
이제 내 나니 35세. 우여곡절이 많은 장애인입니다.
당신도 장애인이면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법이 나의 작은 꿈들을 다 잃게 했습니다.
……
나의 주위 계신 동료 여러분께 부탁이 있습니다.
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꼭 이어주십시오.
……
제한된 일상을 바꾸는 혁명: 우동민, 박기연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
―우동민
중증장애인 당사자로서, 중증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지원 체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미비했던 시절부터 이동권과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는 투쟁에 헌신한 두 열사의 이야기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박기연(1959. 5. 25~2006. 6. 2)과 우동민(1968. 10. 24~2011. 1. 2)이 바로 그들이다.
박기연은 진보적 장애인운동이 세력화하고 중증장애인이 장애인운동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2000년대에 활동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한다. 그전까지 천주교 인천교구 자조모임 ‘엠마우스’를 통해 세상과 접촉해왔던 그는 2000년대에 들어 서울을 중심으로 장애인 이동권투쟁이 펼쳐졌을 때 그 변화를 기민하게 감지한다. 전동휠체어를 움직여 투쟁의 현장으로 나아간 그의 궤적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누군가는 월드컵의 해로만 기억하는 2002년, 박기연은 장애인이동권연대의 인천 지부를 만들기 위한 준비모임과 서명운동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당시 인천장애인이동권연대는 연대투쟁을 많이 다녔는데, 박기연은 이주민이나 성소수자 권리투쟁에도 참여했다.
빼빼 마른 몸으로 휠체어 위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고역이었을 텐데도, 오히려 다른 뇌병변장애인들을 만나 집회 참가를 독려하는 그였다. 체계적인 활동지원서비스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일부러 물이나 음식을 최소한으로 섭취하는 습관을 들이기까지 했다. 문장 하나를 말할 때 한 음절 한 음절에 온 힘을 실어야 하는 그가 함께 투쟁하는 이들에게 주려고 고심해 선택한 한마디가 있었다. ‘이건 우리가 해야 되는 일 아니냐.’ 박기연에게 이동권투쟁은 바로 ‘나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은 점차 교육권과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요구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 못해 신체 관리를 거의 할 수 없었던 그에게 활동지원제도의 도입은 그야말로 ‘생존권’의 문제였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삶과 투쟁하는 길을 선택했다.
중증 뇌병변장애인으로 유년 시절과 청년기의 대부분을 집 안 혹은 시설에서 보낸 우동민 역시 사회적 자원이나 복지서비스를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깊은 고립과 단절을 경험한 이였다. 그는 명휘원이라는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5년을, 명휘원에서 운영하는 그룹홈(공동생홀가정)에서 5년을 보낸 이후 또다시 재가 장애인이 되었다. 1996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10년 전 시설에 입소하기 전과 10년이 흐른 뒤 그의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2004년 명휘원 시절에 가깝게 지내던 동료 신인기와 우연히 마주친 우동민은 그의 임대아파트를 드나들며 자립의 꿈을 키우게 된다.
우동민은 자신이 소속된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성북센터) 동료들과 끈끈한 연대의식을 나눴다. 동료들은 소리 내어 말하기 힘든 그가 긴장을 덜고 말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들이었다. 2005년 성북센터가 문을 연 이래로 우동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무실에 출근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시 이원교 소장을 제외하고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는 스스로 책임감을 갖고 집회나 기자회견, 자조모임 같은 중요한 업무를 맡았다. 중증장애인 당사자로서 직접 목소리를 내고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동민은 빨간색 전동스쿠터를 타고서 집회 현장을 누볐다. 그가 활동하던 2005~2010년은 유독 굵직굵직한 장애 이슈가 많던 시기였다. 정립회관 투쟁, 활동지원서비스제도화 투쟁, 성람재단·석암재단 비리 척결투쟁, 탈시설 권리 쟁취투쟁, 장애등급제 폐지투쟁 등 그 모든 현장에 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과 시간을 쏟아부은 투쟁은 활동지원서비스제도화 투쟁이었다. 장애인 활동지원이 중증장애인의 생명과 직결된 중대 사안임에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활동지원서비스에 대한 책임을 정부에 떠넘겼다. 그 와중에 서울시는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건립 예산으로 할당된 7000억 원이 부족하다며 활동지원서비스 예산으로 책정된 15억 원을 깎으려 했다. 우동민은 서울시의 이러한 행태에 맞서 조직된 중증장애인들의 투쟁에 참가해 삶과 투쟁에 대한 처절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를 비롯한 중증장애인들은 거친 아스팔트 위를 맨몸으로 기어 노들섬까지 행렬했다. 살이 찢겨 피가 흘렀지만 우동민은 멈추지 않았다.
우동민과 박기연은 운신과 활동에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는 중증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한 이들이었다. 중증장애인의 ‘최소한의’ 삶의 조건인 활동지원서비스를 제도화하기 위해 두 열사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을 놓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들의 죽음을 두고 “살 수 있었던 죽음”(박기연) 혹은 ‘억울하고 갑작스러운 죽음’(우동민)이었다고 운을 뗀다. 자신 혹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생을 위해 싸움의 의지를 불살랐던 박기연이 2006년 “너무 힘들다, 오늘 죽으러 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지하철역에서 생을 등졌을 때 동료들은 슬픔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우동민은 2010년 12월 3일 ‘세계 장애인의 날’ 국가인권위원회의 파행적 운영에 문제를 제기하며 건물 전 층 점거 농성을 벌이던 도중 폐렴에 걸려 이듬해 1월 2일 숨을 거뒀다. 당시 인권위 측은 경찰을 동원해 출입을 통제하고, 엘리베이터 운행 중단, 활동지원사 출입 통제, 난방과 전기 중단, 식사 반입 저지 등 반인권적인 행태를 일삼았고, 그 때문에 건물 안에서 농성 중이던 중증장애인 활동가들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우동민을 비롯한 활동가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점거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들이 떠난 지 어언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 동료들은 여전히 같은 질문을 되뇐다. 그/들은 왜,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