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학의 도전 - 변방의 자리에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다, 2019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
장애인의 몸이 문제인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가 문제인가?
장애해방을 향한 아홉 가지 여정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장애학 함께 읽기》 등의 책을 통해 ‘장애’를 ‘개인의 몸’에 존재하는 손상이 아닌 ‘사회적 산물’로 볼 것을 강조한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겸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김도현이 10년 만에 새로운 저서로 돌아왔다. 김도현은 여러 저작과 번역서를 통해 비장애인 중심 사회의 면면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한편, 장애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열어주는 해외의 여러 이론들도 활발히 소개해왔다. 이번에 펴낸 새 책 《장애학의 도전》에서는 장애인을 비롯해 인간의 위계에서 가장 후미에 위치한 이들의 자리에서 사회를 바라보고자 했다.
그 ‘변방의 시좌’로 장애인과 소수자를 향한 편견 어린 사고를 낱낱이 파헤치는 동시에,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장애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뤘다. 여전히 지배적인 ‘우생학’ 논리와 시스템, 장애인이 겪는 사회적 억압과 배제, 장애인의 자립?자기결정권?노동 등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하고도 논쟁적인 화두를 엮어낸 것이다. ‘장애인 차별 철폐’ 외침이 계속되는 투쟁 현장과 연구 그 무엇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몰두해온 저자의 세심한 통찰을 따라가보자.
‘장애’ 만드는 사회를 파헤치다
우리는 흔히 장애인을 몸에 일정한 손상을 입어 어떤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즉 ‘몸에 존재하는 손상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장애인을 인식하는 지배적인 방식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합당해 보이는 이 설명은 세계보건기구 WHO가 명시한 장애 정의(국제 손상?장애?핸디캡 분류, ICIDH)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장애학은 바로 이 매끄러운 논리에 틈을 낸다. 그 ‘할 수 없음’의 원인이 진정 개인의 몸에 존재하는 신체적, 정신적 손상이냐고 되묻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이 일반 시내버스에 승차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WHO의 ICIDH 기준에 따르면, 이들이 해당 버스에 탈 수 없는 이유는 몸에 손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제정으로 국내에 저상버스가 배치됐고, 똑같은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은 이제 저상버스에 탑승할 수 있게 됐다. 이렇듯 동일한 손상을 지닌 사람이, ‘버스 타기’라는 동일한 행위를 어떤 경우(일반 시내버스)에는 할 수 있고, 어떤 경우(저상버스)에는 할 수 없다고 할 때, 과연 ‘버스를 탈 수 없음’의 원인이 개인의 몸에 존재하는 손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는 동일한 손상을 지닌 사람으로 하여금 버스를 타거나 탈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정 개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손상’이 손상 그 자체를 넘어 ‘~할 수 없음’이라는 장애로 번역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때 장애학은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특정한 관계에 초점을 둔다. 그 관계란 바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관계이며, 이는 흑인이나 여성 같은 또 다른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애인이라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 설정 역시 완전히 달라진다. 장애의 근본 원인을 ‘손상’으로 규정한다면, 그 해결책은 몸에 있는 손상을 ‘뜯어고치는’ 것뿐이다. 그러나 사회적 차별과 억압이 ‘손상’을 궁극적으로 ‘장애’로 만든다는 통찰을 공유한다면, 바로 그 차별과 억압의 구조를 바꾸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는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캐치프레이즈를 이제 사회 구성원 모두가 마음에 새겨야 할 때다.
우생학이 지배한 인류의 20세기
인류 역사상 몸에 존재하는 특정한 이상이나 손상은 언제나 ‘열등함’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손상’을 ‘장애’로 만들어온 역사는 그만큼 유구하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마저 ‘정신적으로 불치의 결함이 있는 사람들’을 손수 죽일 수 있도록 사법제도와 의료제도를 입법화해야 한다고 언급했으니 말이다(《국가》 3권). 무엇보다도, 인종의 질을 개선해 더 나은 인간을 창조하려는 서구 사회의 오랜 욕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우생학을 지탱하는 것은 곧 우등한 인간 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위선택이 필요하다는 믿음이다. 지난 20세기는 그야말로 ‘우생학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 ‘생존 경쟁에 따른 자연선택’론을 정식화한 이후, 인간 사회를 진화론적 관점에 의거해 설명하려는 ‘사회적 다윈주의’가 영국에 확산되기 시작한다. 물론 ‘경쟁’과 ‘도태’의 논리 자체가 다윈이 살던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정신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좀 더 공정할 것이다. 미국은 우생학을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시킨 나라로, ‘철강왕’ 카네기의 카네기연구소, ‘석유왕’ 록펠러의 록펠러재단, ‘씨리얼왕’ 존 켈로그의 인종개량재단 등 대자본가들이 우생학의 재정적 후견인을 자처했다.
우생학의 선풍적인 인기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강제로 혹은 자신도 모르는 새 단종수술을 당하게 된다. 1907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세계 최초로 단종법이 통과되고, 단종수술이 하나의 국가정책으로 확립된 이후, 단종법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나치 독일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단종수술을 시행하고, 안락사라는 미명하에 장애인을 집단 학살하기까지 했다. 최상의 복지정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북유럽 국가(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도 우생학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무엇보다도 스웨덴은 전 세계 최초로 (민간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 ‘국가인종생물학연구소’라는 우생학 연구 기관을 설립한 나라로, 다른 이웃 국가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단종법을 시행했다.
우생학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이제 그런 끔찍한 우생학적 폭력은 사라진 걸까? 놀랍게도 우리는 여전히 우생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시대 변화에 부응해 ‘인류유전학’과 ‘의료유전학’이라는 간판을 내건 새로운 우생학적 시스템은 훨씬 더 교묘하게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꼭 단종수술이나 안락사 같은 방식이 아니더라도, 장애인의 탄생 자체를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이상적인 기술들을 발전시킨 것이다. 산모 혈청 검사, 초음파 검사, 양수 검사 등 산부인과에서 흔히 실시되는 산전 검사가 대표적이다. 이런 검사들을 통해 태아의 장애 유무를 미리 확인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장애를 가진 태아에 한해 선별적 낙태가 허용된다.
산전 검사는 표면적으로 예비 부모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로서 정당화되며, 꽤나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산전 검사는 사실상 ‘행선지가 정해진 기차표’나 다름없다. 임신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산모 혈청 검사 같은 선별 검사는 이미 양수 검사 같은 진단 검사를 전제하며, 진단 검사는 다시 필연적으로 선별적 낙태를 전제하게 된다. 미국과 영국의 통계에 따르면, 양수 검사를 통해 다운증후군을 지닌 태아를 임신한 것으로 진단된 여성들의 85퍼센트 이상이 ‘낙태’를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산전 검사 및 검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유전 상담이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치료할 수 없는 이상이라면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논리는, 장애를 단순한 비극이 아닌 삶의 엄연한 일부로 여기고 살아가는 수많은 장애인들의 경험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또한 장애아의 낙태를 선택하도록 하는 사회적, 경제적 압력은 어떠한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미비한 사회에서 장애아를 낙태하는 부모들의 선택을 과연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신자유주의적 통치 환경이 시장의 원리와 욕망을 내면화한 ‘자기-경영적’ 주체를 지속적으로 생성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우생학을 바탕으로 한 ‘유전학적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이다. 이제 노동은 더 이상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자가 지닌 적성 및 재능으로서의 ‘능력자본’이며, 이 ‘능력자본’에 따라 임금의 수준이 달라진다. 따라서 개인은 ‘기업가의 마인드’로 자기 자신을 운용해야만 한다. 자기개발서 탐독, ‘스펙 쌓기’로 대표되는 자기 투자, 외모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성형수술 및 피트니스가 모두 그런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유전적, 선천적 결함을 지닌 장애인은 출발선에서부터 취약한 존재가 된다. 무한경쟁이 펼쳐지고 ‘비물질 노동’의 중요성이 확대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장애인은 과연 배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히려 남들보다 더 우수하고 결함이 없는 아이를 갖고자 하는 우생주의적 욕망이 확대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건 아닐까? 이것만은 꼭 기억해두도록 하자. 시장에서 판매되는 유전학적 서비스와 생명공학 상품은 얼마든지 우생주의를 가동할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에 도전하다
좀 더 시야를 넓히면,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문제 설정이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특정한 관점과 맞닿아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책은 인간중심주의, 즉 휴머니즘이야말로 비장애인 중심의 세계를 강화하며, 따라서 장애 해방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세계관이라고 지적한다. 언뜻 우생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휴머니즘이 어째서 장애인을 억압하게 되는 걸까?
근대 서구 문화의 세계관이기도 한 휴머니즘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이 기준에 따라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성을 지닌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로 양분되며, 세계 또한 인간계와 자연계로 쪼개진다. 언뜻 ‘모든 인간’을 ‘평등한 이성적 존재’로 호명하는 듯한 이 보편 명제는, 다른 한편으로 ‘이성적이지 않은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는 대우명제를 함축한다는 점에서 매우 기만적이다. 다시 말해 이는 어떤 규범성과 정상성에 미달하는 다른 인간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인간중심주의의 극복’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인 피터 싱어 역시 끝내 생명의 가치에 위계를 설정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되풀이했다. 그는 인간이 동물들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수많은 행위들이 ‘종차별주의’에 따른 것이라며, ‘인간 동물’이 아닌 ‘인간 아닌 동물’의 권리와 평등을 주창한 바 있다. 하지만 ‘인간 아닌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며 일부 동물을 ‘인격체’의 세계로 편입시키자고 이야기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성’과 ‘언어능력’을 근거로 내세운다. ‘인간 아닌 동물’의 존재를 사유하기는 했지만, 특정 생명이 더 가치 있다고 전제하는 그 위계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일부 동물이 인격체의 세계로 편입될 때 일부 인간은 반대로 비인격체의 세계로 추방된다. 동물보다 낮은 ‘이성’과 ‘언어능력’을 지닌 인간들 말이다. 결국 싱어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섰다고 보는 해석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나이브하다. 오히려 그가 ‘인간중심주의’의 폭력적인 본질을 정확히 구현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17세기의 스피노자, 그리고 2011년 타계한 린 마굴리스 같은 학자가 선구적으로 통찰했듯, 인간은 다른 생명체 혹은 미생물들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 심지어 이들과의 공생관계 없이는 살아갈 수조차 없다. 우리 자신이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해내고 있다고 믿는 순간조차 우리는 타인 혹은 다른 개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이런 관계성은 ‘거대한 존재의 사슬’이라는 진화의 관점을 취하는 순간 가려진다. 우리를 이루는 이 수많은 관계들을 인식하게 되면, 더 이상 여러 존재들을 가르는 위계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건, 더 하등하거나 고등한 존재를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와 다른 존재의 만남이다. 그 만남을 통해 서로의 역량은 증대될 수도, 감소할 수도 있다.
일례로, 장애인과 활동보조인(활보)의 관계에 주목해보자. 활보란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못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게 아니라 두 개의 다른 신체가 한 몸이 되어 만들어내는 새로운 활동”이다. 집회 현장에서 강제로 연행당하며 경찰에게 전동휠체어를 빼앗긴 중증장애인들의 다음과 같은 외침은 또 어떤가. “이 자식들아, 그건 내 몸의 일부야!” 중증장애인과 전동휠체어의 만남이 어떤 ‘역량의 증대’를 가져오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새로 쓰는 자립과 의존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누군가에게/무엇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의존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비틀고 개선할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흔히 우리는 ‘의존’과 ‘자립’을 대척점에 두곤 한다. 중증장애인들에게 강력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던 ‘자립생활운동’ 역시 의존과 자립의 이분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전미자립생활협의회에 따르면, 현재 자립생활 개념 역시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타인의 개입 또는 보호를 최소화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이 정의의 핵심은 ‘자기결정권’이다.
그러나 이런 ‘자기 결정’ 모델은 발달장애인이나 정신장애인을 비이성적인 존재로 치부하며 다시 한 번 이성중심주의적 사고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장애운동의 지향이 장애인을 정상적인 존재로 인정받게 만드는 것에 있지 않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이분법적 틀 자체를 해체하는 것에 있듯, 이제 우리는 ‘의존적인 존재’라는 낙인과 억압의 기만성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장애인은 자립적인 존재’라고 맞설 것이 아니라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 자체를 깨는 것, 인간이 그 자체로 의존적인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자립과 의존의 관계를 재구성하게 되면, 자기결정권에 대한 이해 역시 달라진다. 자기결정권이란, 흔한 오해와는 달리 모든 상황에서 어떤 주체가 혼자서 결정한 대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권리를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자기 혼자 결정하는 그런 삶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자기결정권은 결정을 내리는 여러 주체들이 서로 의존하며 여러 의견과 판단을 소통, 조율해가는 와중에 실현되는 권리이다.
물론 그전에 이성과 언어를 지닌 인간만이 판단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통념부터 깰 필요가 있다. 특히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고려할 때는 더욱더 그렇다. 어차피 (소통이) 안 된다는 생각, 소통과 조율의 과정이 힘들다는 이유로 과정 자체를 생략하고 그 사람을 배제한다면, 그건 분명 자기결정권 침해다. 판단과 소통의 능력을, 표준적인 이성과 비(발달)장애인 중심의 언어 표현에 국한해선 곤란하다. 서로 다른 소통 방식을 지닌 사람들끼리의 만남이 어떤 새로운 역량을 빚어낼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