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돼지인간은 별들 속에서 최후를 맞을 거예요. 곧, 머지않아서.”
캐롤 페이지, CP, 냉정한 돼지, 코범벅. 나는 대개 이렇게 불린다. 내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는 밤마다, 나쁜 시기에는 시간마다 머릿속에서 고요히 소곤거렸다. 이 목소리는 기억도 나지 않는 때부터 들리기 시작한 뒤로는 멈춘 적이 없었다. 목소리 덕분에 감당할 수 없는 온갖 모욕과 고통 속에서도 인내심을 유지할 수 있었고 비범한 능력으로 일해낼 수 있었지. 혹시 내 스스로의 목소리였을까?
어느 고요한 밤, 목소리가 더 크게 말했다. “이리 와요. 기다리고 있어요.”
“갈게요…. 돼지인간은 별로 갈게요.”
이 작품은 2016년도에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소설집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에 수록되었던 중편 〈돼지제국〉의 개정판입니다. 출간 당시 표제작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에 힘입어 YA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결정되어 단행본으로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선을 보입니다.
하지만 1981년에 발표된 이 소설이 모든 분께 사랑을 받았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굿리즈닷컴>에 어느 독자는 다음과 같이 악평을 남겼다고 하지요.
“액션이 넘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쓰든가, 로맨스를 쓰든가, 아니면 한심한 남성들을 향해 어둡고 냉소적인 분노를 쏟아내든가 하나만 할 것이지 다 하려다 망한 작품!”
거꾸로 말하자면, 이 작품에는 액션 넘치는 스페이스 오페라도, 지구인과 외계인의 종족을 뛰어넘는 절절한 로맨스도, 한심한 남성들을 향한 어둡고 냉소적인 분노도 모두 만나실 수 있습니다. 망한 작품인지 아닌지는 부디 독자 제위께서 현명히 판단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작품을 주변의 청소년에게 권하는 게 좋을지 아닐지도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SF를!
저자소개
본명은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으로 1915년에 변호사 아버지와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화가, 예술 비평가, 공군 조종사와 군 정보원, CIA 정보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고 제대 이후 대학에서 실험 심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심리학 박사 과정을 마치던 1967년에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필명을 만들었다. 군대나 CIA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은 경험을 많이 했던 그녀는 ‘여성SF작가’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고 싶지 않았기에 필명을 남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팁트리는 이후 10년 동안 다른 작가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일 없이 작품과 편지로만 교류했다. 1970년대 초에는 라쿠나 셸던이란 다른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라쿠나 셸던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유사성이 지적됐지만 팁트리의 영향을 받은 여성작가라 여겨졌다. 1977년에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라쿠나 셸던’이 동일인물이며 팁트리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큰 충격을 일으켰다. 이 사실이 불러일으킨 후폭풍은 대단하여 SF 소설계에선 ‘팁트리 쇼크’라는 말까지 생겼다. 팁트리는 이 사건 전후로 모친의 죽음, 남편의 알츠하이머병 발병, 의붓딸의 자살 등 연이은 사건을 겪으며 남아있던 원고를 태워버리려 하기도 했다. 몇 년 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란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재개했지만 예전처럼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못했다.
팁트리는 다른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을 포함해 총 한 편의 시집과 두 편의 장편소설, 일흔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SF 소설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으며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판타지문학상 등 다수의 주요 SF 문학상을 석권했다.
말년에 이르러, 남편의 간병을 계속하던 팁트리는 남편의 죽음이 가까워진 1987년 5월 19일에 눈 먼 남편을 산탄총으로 쏘아 죽이고 자신도 삶을 마감했다. 1991년에 페미니즘 문학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기리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기념상’(현 아더와이즈상)이 제정되어, 해마다 젠더에 대한 문학적 시야를 넓힌 SF 소설과 판타지를 대상으로 수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