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언어학 - 사회언어학자 김하수의 말 읽기 세상 읽기
“늘 언어가 사회를 변혁하는 힘의 원천이 되기를 고대했다.”
사회언어학의 개척자 김하수가
거리에서 건져 올린 말과 삶에 대한 성찰
언어학자 김하수는 사회언어학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국어학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나의 관심은 늘 ‘언어와 그 무엇’이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언어 자체에만 몰두하던 연구에서 벗어나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도록 지평을 넓혀왔다. 『거리의 언어학』은 당대의 언어와 사회를 끊임없이 관찰해온 언어학자가 들려주는 우리의 말과 삶에 대한 성찰이다.
_ 세상은 언어로 이루어졌다
언어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사람과 만나 인사를 하고 잡담을 나누는 것부터, 지식을 저장하고 전달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언어활동이 쌓여 만들어진다.
1장에는 공기처럼 늘 곁에 있는 ‘언어’에 대한 생각들을 모았다. 첫머리에서는 ‘생태계’라는 개념을 빌려와 언어를 설명하는데, 저자는 그 이유를 ”남의 언어를 경멸하지 않고, 이 땅의 모든 언어가 뭇 생명처럼 모두 다 귀한 가치를 품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언어가 귀하다는 생각은 ‘언어 인권’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인식과 감각, 정서 등이 겹겹이 쌓인 언어를 지키는 일, 다른 이의 모어를 존중하는 일의 필요를 강조한다.
저자는 거리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일상적인 언어생활도 날카롭게 관찰한다. 잡담의 기능과 가치를 포착하는가 하면 이름 짓는 것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사투리의 여러 가지 면모를 뜯어본다. 사과에 대해서는 “잘못을 저지름과 상대의 문책을 통해 손상된 자기 정당성을 말하기를 통해 회복하는 일”이라고 풀이한 뒤에 사과를 하는 쪽과 받는 쪽의 태도에 관해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_ 한국어를 생각하다
언어는 감정, 논리, 맥락 등을 늘 달고 다니는데 사회언어학자는 예민한 촉으로 언어 주변의 것들을 더듬어 감지한다. 2장에는 한국어와 그것을 둘러싼 것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삼팔따라지, 마카오 신사, 꼬방동네’ 등 사라진 어휘를 꼽아보면서 어두웠던 사회의 한 단면을 읽고, ‘오타쿠, 노가다, 무데뽀’처럼 통속적인 일본어 어휘에서는 꼬여 있는 한일 관계를 포착한다. ‘미혼모’는 등재되어 있지만 그 상대방을 호출하는 호칭이 없는 데 대해서는 젠더 불평등을 읽으며, ‘ㅋㅋㅋ’ ‘ㅠㅠㅠ’와 같이 새로 등장한 표기법에서 문자의 새로운 용법을 찾아낸다. 외래어 홍수를 염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언어를 곱게 다듬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두려워하거나 지나치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세계 여러 문자들을 살펴보면서 한국인들이 한글에 대해 품고 있는 자부심을 냉정하게 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저자는 국립국어원 언어정책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언어 정책에 관한 관심도 놓치지 않는다. 약 130년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 주변부의 작은 언어였던 한국어를 “‘국어’라고 부르고, 이 언어에도 ‘체계’가 있다며 연구를 하고, 이 언어에도 ‘유구한 역사’가 있다고 주장한 몇몇 선각자”들을 소개하며 한글맞춤법의 역사를 알아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짚어본다. 또 2016년에 공용어로 인정된 ‘한국수화언어’와,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이야기하며 그동안 가려져 있었으나 앞으로 잘 다듬어가야 할 한국어의 일면을 설명한다.
_ 차별하는 언어, 배제하는 사회
인권 감수성을 갖추지 않고는 함께 어우러져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인권의 성장은 반드시 언어의 변화를 동반한다. 3장에서는 인권 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언어 사용을 고민해본다.
저자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는 상대방의 신상에 대한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물으며 이름 외의 정보, 즉 나이, 성별, 학교, 출신지 등은 차별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주부, 여대생, 노인 등으로 특칭화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를 거론하고, 학번이나 사법연수원 기수로 줄 세우는 문화도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가족 관련 호칭에 대해서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다. 가족의 형태가 달라짐에 따라 이를 지칭할 신조어가 등장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더 나아가 “가족의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적 가족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여성을 차별하는 가족 내 호칭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가부장적 친족 제도는 더 이상 미풍양속이 아니며, 친족 내부의 ‘상부상조’와 ‘품앗이’는 이제 사회보장과 복지 제도를 통해 해결하는 게 옳다”고 말한다. 한편, 소통 장애로 불편을 겪는 노인들의 언어 문제를 들여다보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물음을 던진다.
_ 언어학자의 감수성으로 바라본 동시대 이야기
저자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4년 동안 매주 한겨레신문 ‘말글살이’ 칼럼난에 글을 연재했다. 당시의 사건, 사람과 동시에 호흡하며 써온, 대개는 길거리를 걸어가면서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단상들이 담긴 칼럼이었다. ‘말글살이’를 연재하는 동안 한국 사회는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왔으며, 그것을 목격하고 포착하고 기록하는 언어학자의 귀와 손은 분주했다. 『거리의 언어학』은 ‘말글살이’를 바탕으로 글을 추리고, 큰폭으로 손질하여 엮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