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페미니스트
집사람, 남성 아내, 시시한 일상을 살아내는 시민…
삶을 반짝이게 하는 남성 페미니스트 연대기
조한혜정 교수, 김현 시인 추천
과제와 책임을 떠맡아
열렬히 응답하는 두 번째 페미니스트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간 남성 페미니스트의 고백록
『두 번째 페미니스트』는 저자 서한영교가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페미니즘을 어떻게 실현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물으며, 삶의 작은 단위부터 구체적으로 가꾸고 돌보는 일에 대해 풀어간 책이다. 시적 언어에 경도된 문학지망생이 눈이 멀어가는 애인의 곁에 머무르기로 하고, 100일간 아기를 품에서 키우며 돌봄을 도맡는 ‘남성 아내’로 변화하기까지, 그는 자기 안의 여성성을 발견하고 키워나갔다.
너무나 확실했던 남성의 세계가 점점 불확실해져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들의 언어에 자주 불끈거리게 되면서, 편하게 살았던 세계를 뒤집고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간 저자의 고백이 이 책에서 펼쳐진다. 동시에 여성과 두루두루 우정을 나누며 언어의 미세한 오류들을 점검하기 시작한 남성 페미니스트의 성장기가 담겨 있고, 수유하는 애인의 곁에서 애간장을 태우며 한철을 보낸 사랑의 기록, 속싸개 위에 아이를 눕히고 최상의 섬세함을 다해 자장가를 불러준 육아 일기가 시인의 섬세한 언어로 그려져 있다.
저자는 그의 어머니, 이모, 친구와 동료 중 절반인 여성들과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해, 남성적 동일성을 위해 억압해야만 했던 자신의 여성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나는 페미니스트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는 절박한 오류를 끌어안은 채, 정체성으로서의 격렬한 페미니스트라기보다 과제와 책임을 떠맡아 열렬히 응답하는 ‘두 번째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애썼다. 첫 번째 사람을 지키고 선 두 번째 사람으로서.
“나는 잊지 않기 위해 기록했다. 출산 후 침대에 누워 회복하고 있는 아내의 눈빛을 잊지 않기 위해, 젖을 먹다 잠에 든 아가의 귀밑머리를 잊지 않기 위해, 썼다. 기도가 아니면 안 되는 순간들을 위해 썼다. 몸에 열이 펄펄 끓는 아가 머리맡에서, 먹은 걸 모두 게우고 있는 아내를 화장실 문밖에서 기다리면서 썼다. 이 기록의 혈관 속에 기억의 혈액이 떠돌고, 기도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_프롤로그
육아를 함께하기 위한
집사람들의 크고 작은 생활의 실험들
저자는 고등학생 때까지 운동도 곧잘 했고, 적당히 욕을 섞어 말할 줄도 알았고,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별 어려움 없이 지냈다. 그의 세계가 크게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열아홉 살이던 2001년부터였다. 온갖 욕설이 난무했던 박남철 시인이 쓴 ‘욕시’를 보고 나서는 며칠간 온몸이 쿵쾅거리는 상태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페미니즘이 저자에게 “들이닥친” 이후부터 당연하고 마땅하게 여겼던 이 세계의 추악함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 불편하고 이상한 세계에서 너무도 편하게 지냈다는 사실이, 여성은 이상한 세계 속에서 계속 상해가고 있는데 남성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징그러웠고 매스꺼웠다.
그 이후로 나는 대체로 불편해졌다. 축구경기가 시작되고 축구팀을 이끌던 한 작가가 능숙하게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경기에 처음 참가한 나를 두고 “빨리 안 뛰어? 뭐 하는 거야 새꺄!” 나는 대개 불편해졌다. 그런 수컷들의 살기 어린 승부욕이 불편해졌다. 나는 대체로 불쾌해졌다. 속옷이 비치는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예 벗고 다니지. 왜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입어. 저런 애들이 진짜 밝히는 애들이야.” 짧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 여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예 나 먹어주세요, 광고를 하는구나.” 친구의 솟구친 말이 불쾌해졌다.
왜 집안일은 엄마가 다 하는 걸까. 부인들은 남편 아침밥은 꼭 챙겨야 한다는 세상의 말을 당연히 여기며 왜 아침부터 한 상 차려내야 하는 걸까. _17쪽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나의 삶을 바꾸지 않겠다는 변명으로 삼지 않고”, 저자가 정의하는 집사람들(집을 근거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애인, 아이)과 리듬을 맞추기 위해 집사람 회의를 하고, 시간과 역할을 분담해 가사노동을 함께한다. 아이도 집사람으로서 가사노동의 몫을 다할 수 있게, 밥을 다 먹고 나면 같이 설거지를 하고, 아침 청소 시간에는 물걸레를 쥐여주고 빨랫감은 세탁기에 넣게 한다.
자본주의 아래 명랑함을 잃지 않기 위해 ‘자본주의 비무장지대’라는 문패를 집에 걸어두었다. 선물, 공유, 생산이 저자와 집사람들을 떠받치는 세 가지 경제원칙이고, “지구에 돈만 벌러 오지 않았다.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겠다. 시를 살아내겠다.”가 집사람들의 받침 문장이다. 한 달에 77만 원 정도를 벌 수 있는 임금 노동을 하며,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만들어 쓴다. 텃밭을 꾸리고 실을 잣고 천을 짠다.
이러한 집사람들의 크고 작은 생활의 실험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식은, 최소생계에 대한 불안을 덜어내고 적당한 임금노동 속에서 육아를 온전히 함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작은 아르바이트들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일해서 한 달에 77만 원 정도를 벌 수 있는 번역, 광고 카피라이팅, 기업의 스토리텔링, 속기, 잡지사 보조 에디터 일들을 돌아가며 했다. 일감은 무조건 일주일에 하루만 하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었다. 그다음 조건은 재택근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말이 좋아 재택근무지 사실 계속해서 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해 일한다는 조건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아이가 이제 막 걸어다니기 시작했기에 집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_242쪽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성과, 수많은 타자들(LGBTQ, 장애인)과 함께 살 수 있게 도와준 것이 페미니즘이다!
여러 가지 실험과 모험을 겪어나가면서도 여전히 저자는 흔들린다. 그러나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남성으로서 “다시 한 번 더” 실패할 것임을 예견하고, 두 번째 페미니스트로서 “평생 거듭”해야 하는 실패 속에 있어야 할 운명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페미니즘은 구체적이지 않고서는 관통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관계의 정치학이자 자유의 형이상학이며 사랑의 변증법인 것이다.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성과, 수많은 타자들(여성, LGBTQ, 장애인)과 함께 살 수 있게 도와준 것도 페미니즘이고, 아이를 돌보며 생명의 질감을 새롭게 배우게 한 것도 페미니즘이었다. 살림을 돌보고 일상을 돌보면서 작고 시시한 것들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를 깨닫게 한 것도 페미니즘이었다.
그래서 그는 ‘구체적으로’ 삶의 방식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한다. 혼인 의례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임신/출산/육아/가사노동을 둘러싼 젠더 질서를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 습관적으로 쓰는 젠더 용어 중에 반드시 고쳐야 할 낱말은 무엇인가? 지구에 해를 덜 끼치는 생활용품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 소비를 덜할 수 있는 생활의 목록들을 어떤 기준으로 만들어볼 수 있을까? 등등.
그에게 페미니즘은 작고 구체적이어서 더욱 반짝이는 스케일로 확장한다. 씨앗을 심고 흙을 가꾸는 일, 실을 잣고 천을 짜는 일, 방바닥을 반짝반짝하게 닦는 일, 100일간 아기를 품에서 키워내는 일, 임신한 애인의 변화를 좇으며 아버지로의 근력을 다지는 일, 팽목항과 광화문에서 울부짖고, 가정폭력 피해 여성 청소년들, 탈학교 청소년들과 함께 글을 읽고 써내려가는 일, 어머니가 기록해둔 가계부 속에 스며 있는 생활의 혼잣말을 기록해두는 일……
일상의 작고 사소한 것들은 날마다 반복했을 때에만, 그 반짝거림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그 반짝거림은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박수소리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감히, 우리라고 말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지향하고, 남성의 젠더 규범을 파격하며 “감히, 살아내려고 한다.” 저자는 말한다. “가볍게, 춤추듯, 반복하며, 실패하며, 조금씩, 앞으로, 한발씩, 그렇게. 페미니즘은 언젠가 도달해야 할 세계의 이름이 아니다. 물음과 시도와 행위 속에서 늘 실현되는 것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