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성, 인간의 재능
“잔혹성은 공격성의 전부가 아니다”
인간 공격성의 긍정적 측면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파헤친 문제작
동물의 행동과 외부 환경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인 비교행동학의 창시자이자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오스트리아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는 자신을 ‘대중과학자’로 자리매김하게 한 화제작 《공격성에 관하여(On Aggression)》에서 공격성은 동물에게 태어날 때부터 내재된 본능이며, ‘종(種)’을 보존하는 데 긍정적 기능을 한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공격성(aggression)은 어떤 의미일까? 공격성은 성(性)적 본능처럼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선천적인 것일까, 아니면 불리한 외부 상황에 대한 반응일 뿐일까? 만약 본능이라면 왜 그렇게 잔혹한 면이 인간에게 장착되어 있는 것일까?
정신분석학 관점에서 인간의 공격성을 본격적으로 다루며 “인간이 공격성이라는 중요한 재능을 갖지 못했다면, 결코 지금처럼 세상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고 심지어 하나의 ‘종’으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 《공격성, 인간의 재능(심심 刊, 원제: Human Aggression)》이 출간되었다.
‘공격성’이라는 용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살인, 폭력 범죄, 학대’ 등 부정적이고 잔혹한 장면이 연상된다. 그런데 공격성이 재능이라니? 생존하는 데 필수 요건이라니? 선뜻 동의하기 어렵고, 희대의 살인자를 위한 불합리한 변론처럼 느껴지는 이 명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책은 공격성의 부정적인 측면을 외면하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잡아떼지 않는다. 되레 “척추동물 중에서 같은 종의 일원을 습관적으로 파괴하는 동물은 인간뿐(7쪽)”이며 “인간이 가장 혐오스러운 잔혹성을 표출하는 경우 이를 가리켜 ‘야만적이다’ 또는 ‘짐승 같다’고 말”하지만 “극도로 ‘야만적인’ 행동은 인간에게 국한된 특징”이라고 순순히 인정한다. 자연계에 우리가 서로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것과 유사한 행동을 하는 생명체는 전무하다는 것. 그렇다면 공격성을 ‘재능’이라고까지 치켜세운 이유는 뭘까?
책은 우선 ‘공격성’이 매우 다양한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젖병을 달라고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울어대는 아기는 공격적이다. 절도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30년 형을 선고하는 판사 역시 공격적이다. 강제수용소에서 저항할 힘이 없는 수용자들을 고문하는 교도관의 행동 역시 두말할 나위 없이 공격적이다. 그보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무관심한 배우자의 애정을 되찾기 위해 협박을 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역시 공격적이다. 하나의 단어가 그렇게 널리 적용되어 경쟁적으로 투지를 불태우는 축구 선수와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저지르는 살인자 모두에게 쓰일 때, 우리는 그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되거나 보다 면밀히 정의 내려야 한다. 공격성이란 엄청나게 복합적인 면을 지닌 단어다.(8-9쪽)
또한 ‘우리 모두를 개탄하게 하는’ 폭력적인 공격성도 있지만,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격성도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일부 정신분석 전문가가 공격성을 ‘좌절에 뒤따르는 반응’ 또는 ‘유기체에 대한 상해를 목표 반응으로 하는 행위’라고 정의하는 것이 공격성의 개념을 제한하며, 공격성이라는 단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 근거로 우리가 지적인 활동을 묘사할 때 ‘공격적’인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예로 든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 달려들거나 그 문제에 파고든다. 우리는 어떠한 주제를 놓고 고군분투하며 어려움을 극복할 때 그 주제에 통달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속속들이 분석하기 위해 우리의 지성이 예리한 통렬함을 키우기를 바라며 우리의 정신을 벼린다. 지적인 과제는 이따금 좌절감을 맛보게 하지만 지적인 활동 모두를 싸잡아 ‘좌절의 결과’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외부 세계를 이해하고 통달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욕구에 부정적인 색깔을 덧입히는 셈이 된다.(10쪽)
어린 아이가 권위에 저항하는 행동은 공격적이지만 동시에 독립성을 향한 아이의 충동을 보여주는 것이며, 권력을 향한 욕망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날 경우 처참한 결과를 낳지만 동시에 외부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구는 인간이 이룬 많은 위대한 성취물의 근간이 된다. 실제로 인간 본성에 공격적이고 활동적인 측면이 없었다면, 인간이 삶의 진로를 정하거나 주변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힘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덮어놓고 옹호하거나, 공격성의 긍정적 기능을 근거 없이 주입시키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그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온, 또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우리 자신의 중요한 본성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효용은 그동안 우리가 쓰고 있던 여러 겹의 색안경을 하나하나 벗겨내 마침내 균형 잡힌 시각에서 우리 누구나에게 있는 내면의 공격성을 바라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아동기와 성인기에서의 공격성뿐 아니라
우울증·조현병·편집증·사이코패스의 공격성까지
영국 최고의 지성, 앤서니 스토가 직조한 인간 공격성의 모든 것
책은 프로이트가 ‘성적 본능’에 천착하는 바람에 ‘공격적 충동’이 인간의 본능으로 인식되는 것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1장)에서 시작해, 공격성이 왜 ‘본능’이며(2장) 사회구조 속에서 공격성이 실제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3장) 또 동물 사회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공격성이 어떻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자 ‘의식(ritual)’으로 자리잡는지 등을 설득력 있게 직조해낸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측면에서 한발 깊이 들어가 개인에게 공격성이 어떻게 발현되고 기능하는지를 살펴본다. 우선, 아동 발달에서 공격성이 어떻게 작동하고 긍정적으로 기능하는지(5장), 또 성인기 삶에서 공격성은 대체 무슨 이득을 가져다주는지(6장)를 다룬다.
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공격성이 정신병리학적으로 인간에게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지를 세밀하게 파헤친다. 우울증(7장), 조현병(8장), 편집증(9장), 사이코패스(10장)에서 각각 공격성의 발현 양상과 기제를 살펴보며, 각 증상뿐 아니라 ‘공격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들여다보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책은,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이 인간의 운명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본성을 바라보는 방식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며, 인간의 파괴적 본능으로서의 공격성과 적대감을 줄이는 방법(11장)을 제안한다.
공격성이 인간 스스로를 파괴할 수도 있지만, 특출한 성공을 이루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이 책의 저자는 믿을 만한 사람일까? 저자는 심리학 고전 《고독의 위로》로 인기를 모은 영국 최고의 지성, 앤서니 스토다. 지난 2001년 3월, 80세의 나이로 타계한 그는 “정신분석 이론을 주제로 앤서니 스토만큼 대중적인 글을 쓰는 작가는 없다(옥스포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 로빈 레인 폭스)”는 평가를 받는 세계적 정신분석학자다. 1968년 첫 출간 이후 1992년 최신 연구와 임상 경험을 반영해 개정을 거친 이 책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독자들에게 “인간의 공격적 행동에 관한 매우 포괄적이고도 흥미로운 연구를 다룬 책(<굿리즈> 독자)”으로 평가받으며 공격성 분야의 고전 반열에 올랐다.
정신분석학자들이 공격성에게 한 일
정신분석학자들은 천성보다 양육을 강조하다보니, 타고난 요인보다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 환경을 어린아이들이 공격성을 발현하는 근본적 요인으로 여긴다. 물론 주변 환경으로 인한 좌절은 불가피하다. 아기가 기대하는 만큼 엄마가 지체 없이 아기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자들은 부모가 유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만 집중하다 보니, 또 부모가 유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결과 아이가 좌절로 인한 분노를 느낀다는 데 온통 신경을 쏟다 보니, 공격성을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며 공격성의 긍정적 측면은 간과해왔다.(21쪽)
프로이트 또한 공격성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책은 그가 인간 사이의 갈등 요인으로 지목한 ‘성적 본능’에 집중하고 자신의 이론을 방어하느라 공격성이 개별적 실체로 존재한다는 점을 간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특히 프로이트의 가장 걸출한 계승자인 멜라니 클라인은 증오, 탐욕, 시기, 분노를 표현할 때 ‘공격성’이라는 용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했으며 긍정적인 면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37쪽)
사회구조 측면에서 본 공격적 충동의 긍정적 기능
성적 본능이 종의 보전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공격적 충동이 성적 본능과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본성에서 가치 있는 부분일 뿐 아니라 사회 구조에서도 핵심적인 요소라는 근거는 뭘까? 이 책은 동물의 행동을 바탕으로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공격적 충동에 긍정적 기능이 있다고 주장한다.(63쪽)
야생동물의 공격적 행동은 흔히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동물이 상대를 죽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먹잇감과 포식자의 관계에 있을 때다. 그리고 먹잇감과 포식자의 관계는 짐작만큼 ‘공격적’이지 않다. 포식자는 먹잇감을 결코 전멸시키기 않는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의 생존도 위협받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물이 ‘공격적’이 될 때는, 다른 동물과 먹잇감을 놓고 경쟁할 때다. 즉, 공격적 충동의 첫 번째 기능은 동물이 생존 투쟁에서 같은 종과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다.(65쪽)
암컷을 두고 벌이는 공격적 경쟁은 여러 동물 종에서 벌어지며, 대단한 싸움으로 이어지곤 한다. 예를 들어 바다표범이나 바다사자처럼 일부다처제로 살아가는 동물은 자신이 거느린 암컷을 강하게 지켜낸다. 그러나 패배한 동물이 심각한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는 거의 없다.(67쪽) 따라서 강한 수컷들의 성 선택은 강인한 유전자를 남기고, 개체를 보존하기 위한 공격적 충동의 두 번째 긍정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공격성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 내부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개코원숭이 무리는 20마리에서 200마리까지 규모가 다양한데, 위계질서가 잘 구축되어 있으며 수컷들은 각자 자기 서열을 잘 인지하고 있다. 이러한 서열이 확립되어 있다는 것은 집단 전체를 놓고 볼 때 유리한 점이 많다. 첫째, 학습 능력이 좋은 동물의 경우 효과적으로 무리를 이끌고 경고해줄 만한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수컷에게 관심을 집중할 수 있다. 둘째, 무리 내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위계질서로 인해 지배력이 약한 동물은 지배력이 강한 동물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대개는 가장 강한 수컷이 신속하게 그 싸움을 진압할 것이다. 셋째, 포식자에게 공격을 당할 경우 견고한 사회구조가 확립되어 있으면 무리의 생존에 큰 도움을 준다. 즉 수컷 개코원숭이들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 협력할 것이고 이때 집단 내에 이미 구축되어 있는 서열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개코원숭이 중에서 무리의 선봉대 또는 주변부 포식자, 예를 들어 표범에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어린 수컷들이다. 만약 그 위협이 심각한 것으로 확인되면, 나이가 많고 더 강한 수컷들이 점점 더 많이 무리에 합류해 마침내 공격적 잠재력을 가진 무리 전체가 동원된다.(70쪽)
개코원숭이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이에서도 집단의 응집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경우 민주주의 원칙이 쓸모없어진다는 사실은 오랜 역사에 걸쳐 확인되어왔다.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된 국가도 외부의 적이 위협을 가하면, 자유주의 원칙을 일부 무시하고 지배력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는 집단 구조로 회귀하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1940년 처칠의 등장이 바로 이러한 경우다. 평화라는 과제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유례없이 단호한 성격으로 평화 시에는 신뢰받지 못했던 처칠은 다른 어떤 동료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 지배적이고 공격적이었기에 전시에는 독보적으로 훌륭한 지도자의 면모를 입증했다. 반대 목소리도 여전히 존재할 테지만, 전시에는 공식적으로 반대가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결국 집권 정부의 정책에 흡수되고 만다. 이와 동시에 대부분의 시민 역시 평화 시에는 거부감이 들 법한 독재적인 규제를 기꺼이 따른다.(75쪽)
식량을 위한 경쟁에서 영역을 위한 경쟁을 ‘관습적’으로
공격성이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스스로를 파괴하기 전에 자연은, 그리고 동물은 어떻게 공격성을 표출하면서도 파괴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81쪽) 핵심은, 공격성 표출은 허용하지만 살육은 하지 않는 관습이었다. 모든 고등동물 집단은 식량을 얻기 위한 직접적 투쟁을 대체해 일종의 ‘관습적’ 경쟁이 일어나는 사회로 진화했다.(82쪽) 자연이 진화시킨 관습 중에서 ‘식량을 위한 경쟁’을 ‘영역을 위한 경쟁’으로 대체한 것은 참으로 절묘하다. 영역성은 개체 간의 서식지를 구분함으로써 각자가 적절한 몫의 식량을 확보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83쪽) 동물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하는데, 이는 실제로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위험한 싸움이라기보다 힘을 시험하는 ‘의식(ritual)’이다. 인간 역시 영역적 동물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86쪽), 천성적으로 이웃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품고 있다.(91쪽) 하버드 대학교의 한 원정대는 뉴기니에 사는 원시 부족 쿠렐루족을 관찰했는데, 이들은 언제나 전쟁 상태에서 살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전쟁이 고질적이고 끊임없이 이어져도, 또 원시적 무기들이 사용되어도 실제로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현저히 적고 적중 한 명이 부상을 입기만 해도 그날의 싸움은 거기서 끝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1년 간 전사자 수가 얼마 되지 않으며, 전쟁이 어느 정도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92쪽)
공격성은 활동성과 동의어다
유아는 기어 다닐 수 있게 되자마자 외부 세계를 탐험하고 파악하려는 노력의 시작을 분명하게 보여준다.(101쪽) 공격적 충동의 중요한 기능은 하나의 종에 속한 개개의 일원이 스스로 살아나가기에 충분할 만큼 독립적이 되고 그들이 낳은 자녀를 보호하고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다.(108쪽)
아이들이 즐기는 놀이를 보면 대부분 공격적인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도둑 잡기 놀이와 서부극 놀이는 아이들이 어느 한 가지 역할을 맡아 자신이 세상에서 어떤 힘을 가졌고 앞에 놓인 장애물을 극복할 어떤 능력을 가졌음을 증명해내는 투쟁의 형태를 보여준다. 아이가 전쟁광이 될까 봐 염려하는 마음으로 어떤 부모는 장난감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모의 전투 놀이를 금하기도 한다. 그런 놀이를 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부모가 염려하는 그런 유형의 인격을 갖게 될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회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공격성 때문이 아니라 개개인의 공격성이 억눌린 탓이다.’(111쪽)
경쟁도 투쟁도 없는 유토피아에서 살면 정말 행복할까?
철학자 버드런트 러셀은 전쟁의 공포와 욕망에서 해방되면 창의력이 증대할 것이라고 믿었다. 과연 그럴까? 책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위대한 문학과 음악은 경제적 궁핍이나 정치적 억압에 자극받아 탄생했다”고 역설하며 러셀이 ‘순진’하다고 꼬집는다.(126쪽)
공격성이 없는 아이가 독립적인 어른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것처럼 어른도 자신의 자율성을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공격적 잠재력을 표출해야 한다며, 분쟁과 폭력을 야기하는 바로 그 공격적 충동이 또한 인간의 독립에의 열망과 성취욕의 근간이라고 말한다.(127쪽)
또한 인간은 비슷한 사람들,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는 동시에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즉 자신과 대항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고 주장하며 “불화, 논쟁 그리고 경쟁적 추구조차 인간 존재에 긍정적 기능을 한다. 나와 생각과 믿음이 다른 타인이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내가 누구인지 또 무엇을 생각하고 믿는지 알겠는가?(134쪽)”라고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