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환에서 거대한 금융화로 - 폴라니의 눈으로 본 현재의 위기
“세계화는 너무 멀리 갔다”
폴라니의 예리한 통찰과 사회적 양심이 선명하게 재현된 역작
자본주의의 황금기 이후 오랫동안 지속된 경기 침체는 한 사람의 오래된 학자를 우리 앞에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주목해야 할 사상가로 언급되고 있다. 칼 폴라니. 과거에 관한 폴라니의 설명에서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 책은 20세기 “거대한 전환”에서 21세기 “거대한 금융화”로 이어지는 세계사적 변화와 발전을 다룬다. 칼 폴라니와 캐리 폴라니 레빗, 두 폴라니의 분석을 통해 대전환의 시대 세계경제의 나아갈 길을 조망하는 책이다.
폴라니의 눈으로 본 현재의 위기
캐리 폴라니 레빗은 우리에게 칼 폴라니의 딸로 더 알려졌지만,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발전경제학자이기도 하다. 《거대한 전환에서 거대한 금융화로》는 올해로 94세를 맞은 그녀가 평생의 학문적 성과와 실천 활동을 바탕으로 세계경제위기의 문제와 발전 과제를 제시하는 책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칼 폴라니를 만날 수 있다.
대니 로드릭의 말처럼, 칼 폴라니의 사상을 오늘날의 문제에 생생하고 긴밀하게 담는 일을 캐리 폴라니 레빗보다 잘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글 모음에서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활동가로서 생생하게 그려냈을 뿐 아니라 세계 경제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매우 선견지명적인 분석 또한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경제사, 경제사상사, 국제경제체제, 그리고 경제발전을 폭넓게 아우른다. 과거에서 호명된 폴라니를 통해 현재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시대에 걸친 두 경제학자의 고투의 기록
1부는 역사와 사상의 대비를 통해 칼 폴라니를 조명한다. 레빗은 20세기와 21세기라는 전환기를 명확하게 대비시키면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고 잇는다. 발전경제학자로서 저자의 통찰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거대한 전환》의 핵심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레빗은 케인스와 하이에크, 마르크스 등 당대 경제학자와의 비교를 통해 폴라니의 사상을 명료하게 정리한다. 폴라니의 자본주의관이나 미래에 대한 청사진 ‘민주사회주의’의 모습도 그릴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선물이다.
아마도 독자들은 폴라니의 눈으로 다시 현재를 본다면 전후 30년의 ‘황금시대’ 이후 그 옛날 19세기의 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를 복원하려는 유토피아적 신자유주의 기획이 오늘날 경제위기와 생태위기, 그리고 대다수 국가의 포퓰리즘과 ‘잠복성 파시즘’을 가져온 ‘본질적 원인’이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폴라니가 19세기의 자유주의, 그리고 자유시장이 인간의 기본욕망에 따라 자발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집단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고 갈파한 것처럼, 현재의 신자유주의 역시 1930년대부터 일군의 사상가와 미국의 자본가 집단이 오랫동안 기획하고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실행된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2부는 발전경제학자인 저자가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목격한 세계화의 과정을 추적한다. 레빗은 케인스주의 질서가 붕괴한 후의 시스템을 기술하기 위해 ‘거대한 금융화’라는 용어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변덕스러운 금융시장의 포로가 된 작금의 사태를 두고, “세계화는 너무 멀리 갔다”고 한탄한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는가?
3부에서 레빗은 1970년대 이후 동아시아, 그리고 최근의 중국과 인도의 부상에 희망을 걸고 있다. 그의 눈으로 보면 라틴아메리카 구조주의의 핵심 처방을 이들 국가가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폴라니가 1940년대에 전망한 것처럼, 레빗은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상호성, 재분배, 시장이라는 세 가지 통합양식이 어우러지고 각국의 문화적 다양성과 정책적 공간을 보장하는 지역주의가 꽃피울 것이라고 보았다.
한미 FTA와 사드, 북핵 문제로 세계의 화약고가 될지도 모르는 동아시아에서 이런 그림을 내다보는 것이 당장 황당할지 모르지만 동아시아는 분명히 그럴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백 년 이상 헤게모니를 행사한 결과, 자신의 낡은 생각이 당연히 세계의 가치가 되어야할 것으로 생각하는 서방에서 그런 세계가 열리지 않을 것도 확실하다.
폴라니가 현대 시장경제의 역사적 특수성을 밝혀내기 위해 고투를 벌인 시간만큼이나 긴 세월을 레빗은 당대의 문제 해결, 특히 제3세계의 경제적·사회적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폴라니가 다시 살아나 현재의 이슈와 싸우는 모습을 우리는 올해로 94세를 맞은 캐리 폴라니 레빗을 통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