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의 종소리 1
[김영애 번역가의 번역 후기를 전해드립니다.]
번역가에게 자신의 취향과 감성에 맞는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크나큰 축복이리라. 그런 면에서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 여사의 『아홉 번의 종소리(The Nine Tailors)』를 번역하는 시간은 나에게는 은혜와 축복이었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옥스포드 대학 최초의 여학생 학위수여자가 되었고, 순탄치 않은 삶의 여정 속에 추리작가에서 기독교 사상가로 거듭난 작가의 생애는 그 자체가 드라마이며, 작가가 글 속에 감춰둔 메시지를 찾아내는 과정 또한 보물찾기 그 자체였다.
작가는 『아홉 번의 종소리』에서 매우 독특한 영국 예술의 하나인 전조 명종술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고 있다. 그에 관한 기본지식과 순열조합에 따른 다양한 종소리 화음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은 이 책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이를 위해 ‘나, 질문 있어요!’ 하는 호기로 영국의 명종가 한 분께 무조건 이메일을 드렸고 진심이 통했는지 답장이 왔다. 50년이 넘도록 교회 종을 울려왔다는 그 분은 명종술의 대가였지만 기본적인 용어 설명부터 영국 명종술에 관한 자료를 모아놓은 여러 사이트를 알려주시고, 심지어는 내가 살던 영국 리치필드의 대성당 종소리도 들려주셨다. 『아홉 번의 종소리』의 정확한 번역을 위해 큰 도움을 주신 영국 버크셔(Berkshire)의 워킹햄(Wokingham) 종지기 존 해리슨(John Harrison) 씨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치밀한 구성 속에서 앞에 툭툭 던져놓은 대사 한마디, 장면 하나마저도 이야기 전개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을 보면서, 작가가 과연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번역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 자신이 이야기 속의 탐정도 되고 범인도 되면서 이스트 앵글리아의 습지벌판을 헤매는 꿈도 여러 번 꾸었다.
선악과를 입에 문 인간군상에게 창조주께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종’이라는 쇳덩이를 통해 대변하는 작가의 언어는 잘 숨겨진 암호였고, 그 암호를 해독하는 동안,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영국의 기억이 떠올랐다. 해 저무는 시간, 텅 비어가는 리치필드 시내에 울려 퍼지던 종소리, 수없이 구경했던 영국 대성당의 모습과 분위기, 그리고 독특한 향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와 추운 봄바람 속에 피어나 땅을 노랗게 수놓은 수선화 꽃들, 따끈한 홍차 한 잔으로 추위를 녹이던 오후의 티타임······.
그 때의 추억들이 떠오르며 이 책을 번역하는 것은 내 삶의 어느 한 자락에 예정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우리가 마주치는 경험은 ‘삶’이라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서로 합력하는 소재이기에 무엇이 주어지던 감사히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사전에도, 식물도감에도 나오지 않은 이스트 앵글리아 지역 사투리로 된 식물이름을 찾는다고 몇 날 몇 일을 허비한 후에 어느 영국인의 블로그에서 우연히 그 열매의 정식이름을 찾아낸 날의 후련함, 교회 내부묘사를 제대로 전하기 위해 고딕식 대성당의 설계도를 들여다 보며 밤을 하얗게 지새운 날들······. 바른 번역에 대한 열정과 기쁨 속에 새롭게 태어난 『The Nine Tailors』 한국어 버전, 그 탄생의 기쁨을 영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랑하는 두 딸, 가브리엘(Gabrielle Yoo), 이사벨(Isabelle Yoo)과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