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라는 계절
“계절은 돌아오고 이야기는 이어진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계속되니까.”
『청춘 파산』 『쇼룸』 『콜센터』를 쓴 소설가 김의경의 첫 에세이
오래전 소설가를 꿈꾸며 서로의 작품을 합평해주던 두 사람이 이제는 작가와 편집자로 만났습니다. 계속 글쓰기를 놓지 않았던 한 ‘소설가 지망생’은 ‘소설가 김의경’이 되었고, 좋은 소설을 쓰는 것보다 좋은 책을 만드는 게 더 즐거워진 또 다른 ‘소설가 지망생’은 ‘문학 편집자’로 살아갑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10대 때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기 시작했던 것, 고시원에서 살아본 경험, 반지하 집에서의 삶…… 같은 것이지요. 편집자이자 독자로서 저는 경험과 생활에서 글감을 찾아 소설로 탄생시키는 그가 좋았습니다. 열일곱 살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던 삶은 자전적 장편소설 『청춘 파산』으로, 반지하 월셋집을 오갔던 삶은 『쇼룸』으로, 콜센터 상담사로 일한 경험은 『콜센터』로 세상에 나왔지요. 그가 그려내는 가난은, 사람은, 생활은, 인생은… 납작한 평면이 아니라 겹겹이 쌓여서 이루어진 입체도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소설이 아닌 에세이 『생활이라는 계절』을 펴냅니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만난 뜻밖의 사람들과 기억할 만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계절별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불행만 있지도, 행복만 있지도 않은 삶, 그 자체를 담백하게 담아냅니다. 일상의 장면 한가운데에 서서, 때로는 한 발짝 뒤에서, 그가 그려낸 사계절의 풍경은 즉석사진처럼 생생합니다. 개인파산을 겪은 가족끼리 오랜만에 만나 놀이공원에 간 일, ‘분식점 아줌마’를 포함한 이웃과의 살가운 대화, ‘폭탑방’에 사는 할머니, 난임 병원을 다니는 일상 등…… 누군가에겐 낯설고 누군가에겐 친숙할 삶의 맨얼굴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힘은 끝내 아름답습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급속도로 휘몰아치며 발목을 잡던 절망의 구렁텅이도 결국엔 삶이라는 흙으로 평평해졌다고,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고 말입니다.
봄 : 포기해버리기엔 아직 이른 때
첫 장 ‘봄’에서 저자는 ‘포기해버리기엔 아직 이른 것’들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남편과 함께 산 지 10년 만의 임신 준비, 개인파산을 겪으며 흩어진 가족이 언젠가 함께 모여 사는 꿈…… 감히 행이나 불행이라고 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없을, 담담히 내어놓는 일상입니다. 그 속에는 어떤 순간에도 잃지 않는 인간에 대한 낙천과 사랑에 대한 믿음 또한 녹아 있습니다.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벚꽃이 만개한 거리를 함께 걸을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읽다 보면 그저 흘려 보내버린 내 일상은 과연 어떤 하루였나, 묵묵히 돌아보게 됩니다.
여름 :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도
저자는 폭염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타인과 맞닿는 생활의 풍경을 채집해냅니다. ‘폭탑방’에 사는 할머니의 생활언어를 기록하고(“폭염 속 옥탑방. 찜통이야, 찜통. 꼭 옥수수 찌는 찜통 같아. 땀으로 몸속의 짠물이 다 나오니까 내가 옥수수가 된 기분이야.”), 자유 수영 뒤에 눈인사만 하던 사람들과 팥빙수를 함께 먹으며 수영을 시작한 사연을 나눕니다.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아가던 그는 이전에 살던 반지하 집, 여름폭우에 물이 흘러들어오던 그곳을 지도 거리뷰에서 보고 추억하기도 합니다. 어느새 그 여름도 다 지나갔습니다. 매일을 살아내다 보면 신산한 여름도, 거리뷰로 바라보듯 관조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고, 그의 잔잔한 목소리는 전하고 있습니다.
가을 그리고 겨울 : 타인의 온기를 입고
찬 바람이 불어오고, 저자는 타인의 온기를 입고 무사히 지날 수 있었던 추운 계절들에 대해 써내려갑니다. 고시원에 살던 겨울날 입동이라며 따끈한 시루떡을 건넸던 옆방 언니, 낯선 이웃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여 잃어버린 반려견을 찾았던 어느 저녁, 식당들이 다 문을 닫는 추석에도 굶는 손님 있을까 봐 문을 여는 분식점 아주머니, 감기몸살을 앓고 있는 저자를 위해 감기약과 좋아하는 음식을 건네고 가는 친구…… 각자도생의 시대에 이제는 귀해진 따스한 오지랖이랄까요. 잊혀질 수도 있었을 작은 온기들이 그의 글을 통해 살아납니다.
그리고 다시 봄 : 삶은 오늘도 계속되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김의경이 그려낸 매 계절의 짧은 글들은 화려한 순간을 박제하는 게 아니라, 힘겹거나 평범한 순간들도 붙잡아 나 자신만의 의미로 꾹꾹 눌러 쓰는 일의 소중함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 책을 덮은 뒤엔 고개를 들어 주변에서 흔히 보던 사람이나 물건을 조금은 더 유심히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들을 충실히 잘 살아내고, 생활의 풍경들을 수납장 정리하듯 정돈해보고 싶어진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겠지요.
“일주일에 한 번, 한 편의 에세이를 쓰는 것은 생활을 정리하는 것과 비슷했다. 에세이를 쓰고 나면 다음 한 주를 가뿐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계절 속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을 잘 살아냈을 때, 비로소 한 꼭지 주어지는 것이 글이었다. 누구나 지금 이 순간 감당하고 있는, 특별할 것 없는 생활인지 모르지만 독자 여러분이 이런 나의 생활에 흔쾌히 들어와주신다면 감사해 마지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