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병 - 인생은 내 맘대로 안 됐지만 투병은 내 맘대로
인스타그램 누적 5천만 뷰 화제작,
암도 어쩌지 못한 악착 발랄 투병기 <사기병>!
어느 날 알게 되었습니다. 4기랍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날, 내 인생이 뒤바뀐 날.’
<사기병>은 윤지회 작가가 ‘위암 4기’ 선고를 받은 날부터의 기록을 그림과 글로 엮어 낸 그림 일기이다. 두 돌을 지낸 아기의 엄마, 무뚝뚝한 남편의 아내, 여러 그림책을 짓고 그린 그림책 작가라는 수식어 외에 ‘위암 4기 환자’라는 꼬리표는 참 달갑지 않은 인생의 서프라이즈였을 테다.
‘드라마 같은 신파는 없었다.’
슬퍼하거나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마치 미지의 삶으로부터 환영 인사라도 받듯 현란한 조명이 내리 꽂히는 수술대 위에 올랐고, 위를 거의 다 떼어 내는 수술을 받으며 그녀는 다시 태어났다.
위암 4기 환자의 5년 이상 생존율은 7%, 이 확률을 뒤집어 보면 5년 안에 생존하지 않을 확률이 93%. 이 자비 없는 확률과의 싸움에서 온갖 항암 치료와 약으로 육신이 너덜너덜해진 순간에도, 작가는 따뜻한 기억을 헤집고 매일 아침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수 있음에 기뻐하며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이 고통을 가져가 주세요.’
<사기병>은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마저 까맣게 잊을 정도의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일궈 낸 항암의 기록이자, 생존율 7%를 향해 씩씩하게 내디딘 발자국이다.
인생은 마음대로 안 됐지만, 투병만은 맘대로 하렵니다
계획한 대로 펼쳐지는 인생은 없다고들 한다. <사기병>은 작가가 온몸으로 겪은 그 빗나감의 기록이다.
룸메이트의 소라 모양 초콜릿을 비롯해 주위에 있는 달달한 간식은 모조리 먹어 치워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군것질 홀릭이었던 작가는 이제 원치 않는 ‘독약스러운’ 약들을 한 줌씩 삼켜야 한다. 위가 없으니 작은 초콜릿 한 조각도 아끼고 아꼈다 겨우 한 알씩 먹어야 하는 귀한 음식이 되어 버렸다.
한때는 패셔니스타를 꿈꿨다. 소품이나 디자인을 보는 감각도 꽤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하지만 말기 암은 어떤 액세서리도 붙지 않은, 고무줄이 쭉쭉 늘어나는 트레이닝복만을 허락했다. 항암 치료와 각종 검사에 금속성 있는 옷들은 불편하기 때문이고, 모든 것을 치료에 맞춰 움직여야 했다.
마음껏 먹을 수 없으니 식탐은 늘고, 깔끔이 소리를 들어 왔지만 항암 치료로 힘들 때는 한 달 넘게 샤워도 못했다.
‘내년에도 볼 수 있을까?’
‘현재’를 바쁘게 살아 내며 커리어를 쌓는 것에 혈안이었지만,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아들의 뒷모습에, 유난히 파란 하늘에, 새잎이 돋은 나무만 봐도 ‘내년에도……’에 대한 바람이 연이어 생각을 뚫고 나온다.
8차 항암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항암 약만으로 치료를 받으며 ‘이제 좀 살만 하다.’를 느낄 새도 없이, 발병 1년 6개월 만에 암은 다시 난소로 전이되었다. 찰랑찰랑하지는 않지만, 가발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남아 있어 준 머리카락에 대한 미련도 이제는 버렸다. 늘 예상 밖의 일들이 마음 한 가닥도 편히 놓을 수 없는 긴장감 속으로 인생을 몰고 가지만, ‘1년 안에 재발할 확률 80%’를 지나 왔듯 작가는 앞으로도 이 확률과의 싸움만큼은 마음 먹은 대로 해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나는 살아 있다.”
‘할머니’ 되는 게 꿈입니다
항암 공부로 똘똘 뭉친 가족들, 항암 치료 중에도 ‘아기는 나중에 가져요.’라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의사, 난데없이 푸시킨의 <삶>을 이야기하며 수줍게 마음을 고백하는 ‘갱상도 사나이’ 아버지, 무뚝뚝한 걸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남편이지만 요동하지 않는 ‘뚝심력’으로묘한 위로를 선사하는 남편, 놀이터를 제 방 뛰놀 듯 천방지방 뛰다가도 이내 꽃잎 한 장을 주워 엄마 손에 꼬옥 쥐어 줄 줄 아는 아이…… 이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작가의 시선으로 여과되어 하루하루 지울 수 없는 기억들로 <사기병>에 쌓였다.
20년 가까이 그림책을 짓고 그린 작가에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만큼 참담한 일이 또 있을까. 그림 한 장을 완성하는 데 예전 같으면 3일이면 그렸을 것을 지금은 두 달이 꼬박 걸리지만 그릴 수 있어서 아주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요즘 다시 조금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직 손이 많이 떨리긴 하지만
그림을 그리다 보면
예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다.”
힘 있게 내리 뻗은 선, 감각적으로 채색된 면이 그림의 전부는 아닐 테다. 손이 떨려서 제대로 선을 긋기 어려웠지만 몇 번씩 다시 긋고 또 그으며 떨리는 손을 더 당차게 부여잡은 삶에 대한 의지, 켜켜이 여며진 작은 바람들이 <사기병>의 지면을 더 가득 채웠다.
<사기병>은 암으로 투병하는 이들만을 위한 에세이가 아니다. 마치 깨지지 않는 사기병 안에 갇힌 것마냥 여러 가지 사연으로 고통의 공기 속을 거니는 이 세대에게, 내 건강, 가족, 주위는 미처 돌볼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에게 매일매일 누리는 일상의 가치를 일깨우는 진심 담긴 서신이자, 이제라도 알게 하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다. <사기병>이 의술이 넘보지 못할 저 너머, 인간 스스로의 용기, 희망이 어떻게 주어진 삶을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