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요리노트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사였다고?
요리에 제대로 미친 레오나르도 다빈치
스파고 만지아빌레? ‘먹을 수 있는 끈’이라는 뜻이다. 이게 무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든 신개념 국수로 오늘날 스파게티의 원조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증언하는 그림 속 요리는? 잘게 썬 당근을 곁들인 삶은 달걀, 풋참외꽃으로 장식한 검둥오리 넓적다리, 자잘한 빵, 뭇국, 장어요리라는 걸 아는가?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혁신적인 요리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요리법은 물론, 주방도구와 조리기구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호기심과 탐구정신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초에 담근 새 요리, 구멍 뚫린 돼지 귀때기 요리, 꿀과 크림을 곁들인 새끼 양 불알 요리, 빵가루 입힌 닭 볏 요리, 온갖 발가락 모둠 요리, 양 머리 케이크, 뱀 등심 요리 등 요리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엽기발랄한 요리들이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의 엽기발랄 요리 레시피 엿보기
온갖 발가락 모둠 요리_
양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소 한 마리, 레몬 세 개, 약간의 후추, 올리브유가 필요하다. 위에 열거한 짐승의 발가락을 모두 잘라내 후추와 올리브유를 섞은 레몬즙에 하루 동안 재어둔다. 은근한 불에 어두운 금빛을 띨 때까지 구워 딱딱하게 굳은 폴렌타에 올려놓고 먹는다. 이 요리는 우리 루도비코 어르신께서 즐겨하시는 담백한 요리 중 하나다.
인간의 진정한 친구 돼지고기_
돼지를 한 마리 잡으면 딱 두 부위만 빼고 모두 먹을 수 있다. 돼지 선지를 햇볕에 굳히면 순대 만드는 데 이용된다. 돼지뼈를 녹이면 기름을 얻을 수 있다. 돼지고기 살은 전부 요리가 가능하다. 살코기를 그냥 먹을 수도 있고 돼지고기 케이크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돼지 머리도 전부 요리할 수 있다. 단 두 개만 빼고는. 나는 여태껏 돼지 두 눈알이 요리로 나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내 얘기의 결론은 이렇다. 수많은 짐승 중에서 돼지야말로 우리 인간의 진정한 친구다.
양 머리 케이크_
양 머리를 세로로 둘로 쪼갠다. 뇌와 혓바닥을 들어내고 당근 한 개, 파슬리 가지 한 개와 함께 물에 삶는다. 세 시간이 지나면 딱딱하게 굳은 폴렌타가 한 겹 덮인 쟁반 위에 국물과 함께 올려놓는다. 여기에 푸른색 소스를 곁들여 내놓는다. 소스는 먼저 들어낸 뇌와 혓바닥으로 만든다. 뇌와 혓바닥을 잘게 썰어 미나리꽃과 함께 삶아 만든다. 이때 미나리꽃의 양은 뇌와 혓바닥 무게의 두 배가 좋다.
요리와 사랑에 빠진 한 천재의 은밀한 취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요리에 대해 쓴 짤막한 글들을 『코덱스 로마노프Codex Romanoff』라는 소책자에 모아두었다. 이 소책자에서 알 수 있듯이 주방, 조리기구, 요리법, 식이요법 등에 관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세심한 관찰은 전문 요리사를 무색하게 만든다. 레오나르도의 천재적인 식도락가의 면모는 새로운 요리법을 제안하고 기존의 조리기구를 개선하는 면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노트에 요리에 대한 생각을 꼼꼼하게 정리하던 시기(1481~1500) 밀라노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의 요리는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었다. 종달새 혓바닥, 타조 알 스크램블, 살아 있는 개똥지빠귀가 가득한 돼지 요리 등이 그 시대를 풍미했다. 화려했던 로마제국의 진수성찬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시의 먹거리는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부자들은 네 발 달린 짐승이나 날개 가진 짐승의 고기를 시도 때도 없이 즐길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폴렌타(polenta, 죽의 일종) 따위의 희멀건 죽으로 겨우 허기를 때우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지중해에 가득한 철갑상어 덕택에 캐비어는 수시로 즐길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노트를 작성할 당시 그는 스포르차 가문의 궁정 연회담당자로서 부잣집 요리라면 유감없이 음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에 서민 음식이었던 캐비어 요리는 당연히 그의 노트에 등장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는 캐비어 요리를 폴렌타보다 더 못한 요리로 여겼던 것이다.
천방지축 주방장 레오나르도가 펼치는 경이로운 요리의 세계
이 책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일단 읽어보면 알겠지만, 레오나르도의 요리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인물을 평가하는 데 대단히 인색하고, 심지어 아주 조롱조로 말하기도 한다. 음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추어올리는 말인지 깎아내리는 말인지 모호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점 염두에 두기 바란다.
둘째, 요리하는 데 사용되는 재료의 양이다. 여기에 소개되는 대부분의 요리는 거대한 만찬에 올릴 것으로 서너 사람을 위해 요리하는 일반 가정 요리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묘사한 요리법을 그대로 따라하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셋째, 이 역시 양에 관련되는 문제인데,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정확한 양을 알 수 없다. 몇 그램, 몇 리터, 큰 숟갈, 작은 숟갈 하는 구분이 도통 안 간다는 것이다. 눈짐작으로 적당히 알아맞힐 수밖에 없다.
넷째, 조리기구에 대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조리기구가 오늘날처럼 세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냄비, 솥, 프라이팬 등으로만 얘기할 뿐 특정 요리를 위한 특정 조리기구를 세분하지 않았다. 음식의 양이나 재료에 따라 짐작해가며 읽기 바란다.
다섯째, 재료의 성격 문제다. 500여 년 전에 해먹던 음식들인지라 재료가 요즘과는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개중에는 실로 ‘엽기적인’ 재료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옛날 어려웠던 시절임을 감안하여 읽기 바란다.
2019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서거 500주년 되는 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평생 동안 요리에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유년 시절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레오나르도는 1452년 피렌체에서 가까운 빈치(Vinci)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르 피에로 다빈치(Ser Piero da Vinci)는 피렌체에서 공증인으로 활약했고, 어머니 카테리나(Caterina)는 빈치의 귀부인이었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열여섯 꽃다운 피렌체 아가씨와 결혼했고, 어머니는 아카타브리가 디 피에로 델 바카(Accatabriga di Piero del Vacca)라는 빈치 출신 과자 제조업자와 식을 올렸다. 그 후 친어머니 없이 자라던 레오나르도는 2년 후 할아버지의 집으로 옮겨와 외로운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그를 양육한 할아버지가 1457년 세금 납부 신고서에 다섯 살로 기재했기 때문에, 1452년생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그 서류 마지막 장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452; 내 아들 세르 피에로의 아들이자 나의 손자가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10시경 태어났다. 그 이름은 레오나르도이다.”
아버지는 결혼한 부인들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네 번이나 결혼했는데, 모두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어쨌든 레오나르도는 아버지 집과 어머니 집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촌스럽고, 꾀죄죄하고, 먹보인’ 아카타브리가(세르 피에로가 묘사한 바에 따른 것이다.)는 레오나르도에게 단것을 실컷 먹이며 섬세한 미각을 키워주었다. 레오나르도는 의붓아버지로부터 단것에 대한 취미와 요리에 대한 열정을 전수받아 평생을 갈고 닦았는데, 너무 열중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다른 뛰어난 재능을 썩힐 뻔했다.
레오나르도는 프랑스 왕과 함께 3년을 식도락으로 보내고 1519년에 죽었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왕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요리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하나.
레오나르도는 그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밀라노 외곽 포도밭을 반으로 갈라 살라이와 바티스타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바티스타는 레오나르도의 개인 요리사였고 살라이는 레오나르도의 식사 당번을 겸한 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