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어휘 - 삶의 해상도를 높여줄 동양 고전의 낱말들
중국 수사학의 권위자이자 이야기꾼 이승훈 교수!
현대 사회의 화두 32가지로 풀어 쓴 동양 고전 이야기
문자를 둘러싼 인간의 염원과 지식의 문화사를 파헤친『한자의 풍경』으로 대중 인문 저자로 자리매김한 서울시립대학교 중국어문화학과 교수 이승훈이 다음으로 선보이는 주제는 중국 고전이다. 보편적인 지혜와 통찰이 담긴 고전 읽기가 붐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이승훈 교수는 고전 원문 그 자체보다는 동시대적인 관점에서 중국 고전을 해석하고 현대 독자들과 연결점을 찾는 작업에 집중해왔다. 적절한 맥락과 배경 안에서 고전을 읽어내야 텍스트에 쌓인 시차가 줄어들고 “고민의 핵심이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32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글자의 어원과 그에 얽힌 흥미로운 고사를 유려하게 풀어낸『인생 어휘』는 동양 고전과 현대 독자들을 새롭게 연결하는 장(場)이다. 일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태도(관찰, 경청, 겸손, 여유 등)부터 사회를 읽어낼 묵직한 화두(공정, 정치, 공감, 법치 등)까지, 고전 속 지혜와 통찰이 이 책에서 시대와 호흡한다.
이승훈 교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르네상스형 이야기꾼이 아닐까? 저자는 원문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파악하는 데 당대의 정치 상황과 역사적 맥락은 물론 진화심리학, 뇌과학, 신화학, 인류학 등 현대의 지식을 그 재료로 삼는다. 성인(聖人)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진화심리학·뇌과학적 접근으로 이어가 확장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인류학·신화학적으로 해석하여 동양 철학의 지형을 살핀다. 다양한 인접 학문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이야기꾼 이승훈 교수를 따라 20권의 중국 고전에서 벼려낸 32가지 단어를 만나보자. 우리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인생 어휘’를 확보할 수 있을 테다.
여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만두는 용기
정체성, 앞뒤가 맞지 않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
관찰, 내밀한 동기까지 살펴보는 일
경청, 타인에게 몸을 기울여 듣기
삶의 해상도를 높여줄 동양 고전의 낱말들
이 책을 구성하는 32가지의 단어는 현대 사회의 면면과 맞닿아 있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여유’일 테다. 여유(餘裕)란 “물질적, 공간적, 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상태”를 뜻하는데, 이 책에서 이승훈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당호인 ‘여유당’ 속 여유(與猶)에 주목한다. 여유(與猶)는 유예(猶豫)에서 비롯된 글자로, 의심이 많아 주위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 도망가는 원숭이[猶]와 코끼리[豫]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 글자는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도인의 신중한 태도를 묘사하는 데 주로 쓰였다. 저자는 다산의 설명을 빌려와 “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그래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 태도”가 여유(與猶)라고 설명한다. 정보의 양이 과도하게 늘어나고 과학 기술의 발전이 그림자 노동을 양산한 현대 사회에서, 풍요 속에서 누리는 여유(餘裕)가 아닌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만두는 여유(與猶)를 가져보자는 이야기는 특별한 위안을 준다.
어느 날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유유자적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장자인지 몰랐다. 그러다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인 게 아닌가? 장자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에는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장자』「제물론」(105쪽)
이승훈 교수는『장자』의 호접지몽 이야기에서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길어낸다. 단일한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던지며, 특정 순간마다의 여러 정체성(停滯性)이 누적되면서 정체성(整體性)이 만들어진다는 새로운 주장으로 나아간다. 인간은 왜 이야기를 통해 일관된 논리를 만들어내려 할까?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은 어떻게 통합된 자아를 만들려는 집착으로 이어졌을까?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며 정체성에 관한 여러 담론을 이끌어낸다.
짧은 호흡의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고 모두가 자기를 표현하는 1인 1미디어 시대, ‘관찰’과 ‘경청’의 어원은 독자들에게 새삼스레 느껴질 것이다. 수리부엉이가 목표물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관(觀) 자에는 시간을 들여 대상을 오래 관찰하고 그 이면까지 읽어내는 일의 가치가 담겨 있다. 상대 쪽으로 몸을 기울여 듣는 모습을 나타내는 경청(傾聽)은 큰 귀와 사람을 조합해 만든 글자인 성인(聖人)의 성 자와 연결되어, 잘 듣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보여준다.
『인생 어휘』의 묘미는 이렇듯 익숙한 어휘들의 어원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에서 출발해 지금의 독자들에게 유용한 통찰로 뻗어나가는 데 있다. 우리의 삶을 비우고 채우는 데 자양분이 되어줄 본격적인 고전 실용서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을 겨냥하는 선인들의 매서운 통찰
어지러운 세상을 선명히 읽어낼 ‘인생 어휘’
무엇보다 한국 사회를 겹쳐볼 수 있는 대목은 4부〈함께함의 낱말들〉이다. 공정, 법치, 수치, 정치 등으로 구성된 4부는 공정의 기준이 무너지고, ‘정치의 사법화’가 만연해지고, 공감 능력이 사라지고 있는 분열과 갈등의 한국 사회를 겨냥하는 성인들의 한마디 한마디로 채워져 있다.
공자가 말하는 사람을 뽑을 때의 기준, 맹자가 말하는 덕치(德治)의 힘, 가까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공감과 연민의 태도는 2,00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시급하고 날카롭게 다가온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를 선명하게 인식하고, 스스로 삶의 정의(定義)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활쏘기 시합에서 가죽을 꿰뚫는 것을 위주로 하지 않은 것은 사람마다 힘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옛날의 도(道)다.『논어』(268~269쪽)
·절실하게 질문하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하는 사람, 인(仁)이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논어』(282쪽)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면 상대는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힘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긴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면 상대는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진실로 따를 것이다.『맹자』(299쪽)
뇌과학과 연결되는 공자의 지혜부터
동·서양 철학 패러다임의 차이까지!
진화심리학, 인문학, 신화학 등 21세기 지식과 20권의 중국 고전의 만남
동·서양의 인문학이란 사실 고전에 대한 주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 최전선의 지식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중국 고전의 사유를 정확하고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돕는『인생 어휘』는 이러한 점에서 가장 다학제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인 인문학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성인들의 지혜는 다양한 과학 지식과 교차한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배를 젓는 법을 빨리 배울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물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몰입에 관한 공자의 설명은 몰입 상태에서 활성화되는 인간의 뇌 영역인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와 연결된다. 20세기부터 이어져온 과학계의 ‘본성 대 양육’ 논쟁(인간의 인격이나 지적 능력 등에 선천적인 유전자와 후천적인 양육 중 어느 것이 큰 영향을 미치느냐는 논쟁)은 맹자의 성선설과 맞닿는다. 인간의 본성은 단서와 실마리에 불과하니 그것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맹자의 주장이 본성과 양육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현대의 과학과 공명한다.
중국 고전을 보편적인 지혜로 읽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동양 철학의 틀이 어떠한 배경에서 구성되었는지, 또 서양 철학과는 어떻게 다른지 그 지형을 살피는 것 역시 이 책의 차별점이다. 저자는 특히 본질과 보편에 관한 두 철학의 입장이 크게 다르다고 본다. 여러 서양학자와 동양학자의 분석을 다채로이 소개하며 사물에 앞서 존재하는 본질과 보편적 진리를 강조한 서양 철학과, 형식과 본질의 조화를 추구한 동양 철학의 패러다임을 비교해 분석한다.
『논어』『맹자』『주역』『도덕경』등 20권의 중국 고전을 총망라하고 다양한 21세기 학문을 넘나들며 풍부한 맥락을 덧붙인 이 책은 왜 지금 우리가 중국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앞으로 동양 고전에서 어떤 의미를 끄집어낼 수 있는지를 한 권의 책으로 보여주는 탁월한 예다. 지금 여기에 살아 숨 쉬는 2,000년의 지혜가 시공간을 넘어 우리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