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사람, 이현옥 - 앎이 볕처럼 스며들던 시간에 관한 기록
나는 절실한 문제를 붙들고
그날 배운 것을 적었고,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것을 적었고,
새로 생겨난 물음들을 적었다.
이 책은 ‘이현옥’의 공부 기록이다. 책의 모든 페이지에서 그는 멈추지 않고 걷는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서재에 파묻혀 있는 학자가 추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갈 때, 그는 절실한 문제를 붙들고 마치 일수 노트를 적듯이 그날 배운 것을 적었고,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것을 적었고, 새로 생겨난 물음들을 적었다. 인류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는 왜 이 모양이고, 아이는 어떻게 키워야 하며, 남편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서 시작했다. 때로는 새로 무언가를 알게 된 희열에 몸을 떨었지만 그런 앎에도 불구하고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은 것도 냉철하게 적었다. 그렇게 그는 지난 몇 년을 걸어왔다.
- 고병권(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
평범한 사람 ‘이현옥’, 공부하는 사람 ‘이현옥’이 되기로 결심하다
- ‘나는 왜 이 모양인가?’에서 시작된 ‘학교 밖’ 공부의 길
여기 이름 석 자가 있다. ‘이현옥.’ 당신은 그를 아는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는 이른바 ‘셀럽’이 아니며, 그렇다고 ‘재야의 고수’라든지, 또는 숨어 있던 연구자나 학자도 아니다. 그럼 그는 누구인가? 평범한 한 사람이다. 조금 더 범위를 좁혀서 말하자면, 주부(였)다. 그런 그가 육십여 년을 살다가 갑자기 자기 이름을 내걸고 책을 썼다. 왜일까? 평범한 한 사람이, 자기 이름 석 자 앞에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어쩌면 거창하고 어쩌면 과감해 보이는 수식어를 붙이면서까지 대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이 책 『공부하는 사람, 이현옥』을 쓴 이현옥은 1960년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며,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맏이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이후 두 번의 결혼을 하고 네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살아온 60대 여성이다. 대한민국의 보통 시민의 삶을 살며 20대, 30대, 40대를 보냈다고 말해도 되겠다. 그런 그가 나이 50이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그 길이 바로 ‘공부’였다. 하지만 그가 나이 쉰에 갑자기,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 공부길에 나섰다고는 할 수 없다. 비록 나이 50이 되어서야 발을 내디뎠으나 그 발을 내딛기까지 수많은 질문이 ‘이현옥’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 안에서 생을 더해갈수록 켜켜이 쌓이며 확대되고 증폭되어왔기 때문이다. 그 질문의 용량을 더는 견딜 수 없어 그것을 터뜨려 해답을 찾겠다고 나섰을 뿐이다. 그렇게 이현옥, 그의 공부가 시작되었다, 나이 오십에.
그럼, 그리 오랜 세월 반복되고 고농도로 응축되었던 그의 질문이란 어떤 것일까? 진리는 무엇인가? 인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주의 신비는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녀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한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다들 의지만 강하면 못할 게 없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그놈의 ‘의지’를 도무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없으니 이 신체는 나에게 붙어 있기는 하지만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떤 이유로 내 의지가 경우에 따라 다르게 관철되는지, 어떤 이유에서 현재 나는 이 모습이 되었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나도 이 의지박약의 상태를 벗고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가전제품 사용법을 잘 숙지하고 나면 그 제품을 100퍼센트로 활용할 수 있듯 ‘나’라는 사람이 어떤 이치에 의해 이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결정되는지, 그런 것들이 내 ‘의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했어야만 했는데 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며 스스로를 낙인찍는 못난이 말고 나 자신을 굳세게 신뢰하는 사람으로 당당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20대, 30대, 40대를 거치는 동안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서 맴돌던 질문, 하지만 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던 이 질문은, 50대에 공부를 시작하고 스피노자를 만나면서 비로소 길을 찾았다.”
- 본문 20~22쪽,「나는 왜 이 모양인가」
20대 이후,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현옥의 마음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대해, 주위의 마땅찮은 사람들에 대한 불만으로 부글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 들끓는 마음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를 모르니 자신의 주장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당신들이 틀렸다”라고 똑바로 들이대지도 못했다.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불만이 ‘비판’과 어떻게 다른지도 몰랐고, 그 불편한 감정이 무슨 연유로 생겨났는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그것이 알고 싶었다.
“철학자는 박식한 사람이 아니라 앎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 ‘공부하는 사람, 이현옥’은 결국 ‘철학하는 사람’
이 책 『공부하는 사람, 이현옥』의 지은이 이현옥은 말한다. 마음의 갈림길도 그렇고, 인생의 갈림길도 그렇고, 갈림길은 끝이 없었다고. 하나의 사안을 앞에 두고도 마음은 너무나 자주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그중 어느 것이 진짜 자신의 마음인지, 어떤 길로 가야 잘 가는 건지 알 수 없어 매번 혼란스러웠다. 매 순간 헷갈리는 ‘선택과 결정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또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밥하고 살림하는 일)이라면 어떻게 고통으로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는가. 내 마음 같지 않아 싫고 밉고 힘든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감당하면 좋은가. 늘 모자라 안타깝지만 직접 나서서 해결할 순 없는 ‘돈 문제’는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여전히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몸’, 즉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더 잘 움직이며 살아갈 수 있는가.
이현옥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여러 갈래의 마음들이 어디서 생겨나 어떻게 변화해가는 건지 알고 싶었다. 진짜 죽도록 힘이 들었기 때문에 꽤 끙끙대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책도 많이 읽었다. 좋은 삶이란 어떤 모양인지, 그런 삶을 살아보려면 뭘 어찌해야 하는지. 네 아이를 낳아 그들이 성인이 되는 긴 시간 동안 바로 그 문제들과 씨름했고, 결국 찾아낸 방법이 공부다. 쉰 살이 되던 해, 그는 마침내 공부를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줄 진짜 공부에 대한 동경이 늘 있었고, 혼자 읽는 책은 한계가 있고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았으나 대학원을 가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으므로 공부의 길이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 신문에서 학교 밖 연구자들이 만든 ‘공부 공동체’가 있다는 기사를 보고는 그만 “심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흥분이 되었다”라고 이현옥은 고백한다.
철학자 고병권은 이 책에 실은 ‘추천의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묻고 싶다. 철학자란 무엇인가. 철학자란 애초에 박식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철학자란 그리스어로 ‘앎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리에 이른 사람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 지식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진리와의 연애가 끝나버린 사람이다. 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했던 일은 진리에 대한, 사람들의 잠들어 있는 연애 감각을 깨우는 것이었다. 공부에 대한 열의, 배움에 대한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것 말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 그것은 공부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고병권은 이 책의 지은이 이현옥을 ‘철학자’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가 보기에, 이현옥은 서재에서 책에 파묻혀 지낼 수 있었던 처지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서재의 철학자 칸트가 집구석에 난 불이나 끄라고 다소 비하적으로 칭했던 사람, 곧 주부다. 실제로 이현옥은 서재에 파묻혀 있던 철학자처럼 박식하지 않고 철학 자격증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좋은 삶’에 대한 물음은 그들 철학자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훨씬 절실했다. “그러므로 이현옥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내가 이 책에서 본 것은 공부하는 사람 이현옥, 철학자 이현옥이었다.”
앎이 볕처럼 스며들던 시간에 관한 기록
- 어렵고 힘들지만 ‘너무’ 재미있는 그 ‘공부’에 관하여
이 책은 ‘공부하는 사람, 이현옥’이 걸어온 공부의 기록이다. 그는 수십 년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내면의 공부를 시작했고, 질문의 끝에서 만난 공부 공동체에서 13년간 몸으로 그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이 책의 모든 페이지에서 그는 멈추지 않고 공부의 길을 걷는다.
지은이 이현옥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 길은 분명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또한 재미있는 길이었다고 말할 뿐이다. 어렵고 힘든 것과 재미있는 것이 결코 상반된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며 도리어 기꺼워한다. 물론 그 어렵고 힘들지만 재미있는 공부의 길에는 스피노자와 니체, 푸코와 들뢰즈, 루쉰이나 마르크스 같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현옥의 공부의 길은 그런 이름들로만 설명될 수 없는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끝도 없이 이어진다.
때로 이현옥은 오래 묵은 질문의 답을 찾고, 때로는 여전히 숙제로만 남는 질문과 마주한다. 즉 그가 품었던 수많은 문제가 책의 끝에 이르러 모두 해결책을 찾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가 자기 마음과 몸의 진짜 주인이 되는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공감”을 넘어 “나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인식”을 열망하게 되는 모습까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갑자기 들이닥친 ‘암’이라는 무섭고 치명적인 질병 앞에서 꿋꿋이 삶을 꾸려가는 모습도 보게 되고, 나아가 자신의 공부를 다른 이들, 특히 이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부인당해온 다른 이들과 엮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모습도 보게 될 것이다.
대학 때의 세미나가 주로 세상 전체의 얼개와 관련되어 있었다면, 나이 오십에 시작한 이 새로운 배움은 그 세상이 다시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공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지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탐정소설이라도 읽는 것처럼 얽혀 있던 고리들이 하나둘 풀리는 강렬하고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 배우는 것마다 모두 그간 내가 품어온 생각을 두드려 깼고, 깨지면서 신나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 본문 82쪽, 「쉰 살 진짜 공부를 시작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열심히’는 나에게 필요한 ‘열심히’가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와 경쟁을 하고 있는 것도, 어떤 자격을 얻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성과를 내서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건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내 목표는 오로지 ‘좋은 삶’을 향해 ‘변해가는 것’이었고, 이즈음에는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다른 힘에 속절없이 휘둘리지 않고 내 삶의 주권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차리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그동안 내가 찾아 헤매던 ‘좋은 삶’이라는 것도. - 본문 110쪽, 「‘열심히’의 다른 사용법」
그래서? 자격증도 돈도 안 생기는 공부를 해보니 뭐가 그리 좋더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공부하는 사람, 이현옥’은 뭐라고 대답할까? 그는 이제 이렇게 답한다. “저는 스스로 강해졌고 가벼워졌으며 명랑해졌다는 걸 알고 느낍니다. 암이 재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돈에 대한 결핍감도 거의 사라졌고요. 컵이 와장창 깨져서 사방으로 유리조각이 튀었을 때 혹은 말끔히 청소한 집 안이 어질러졌을 때도 예전처럼 짜증이 나지 않고, 무엇보다 한숨을 쉬면서 ‘지겹다’라고 중얼거리는 버릇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해야 할 일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게 되었고, 억지로 하는 일도 없어졌으며, 귀찮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좋습니다. 늙긴 했어도 몸은 예전보다 건강해졌고요, 마음에도 근육이 붙어 살림하고 공부하는 일도 점점 더 잘해내고 있답니다!”(「지은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