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일까 상황일까
사회적 상황의 힘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회심리학 고전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스탠포드대학교 심리학자 리 로스가 알려주는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법’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학 교정을 가로질러 걷고 있던 존이 한 건물 출입구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우연히 발견하는데 그 남자가 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존은 그 남자를 도와줄까, 아니면 가던 길을 그대로 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 사람들은 대부분 존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한다. 그는 냉담하고 무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가, 아니면 친절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으로 유명한가? 교내 봉사단체의 성실한 멤버인가? 간단히 말해 존이 어떤 유형이고 과거에 그의 이타주의가 시험대에 올랐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사실 존을 알아도 혹은 존에 관한 어떤 정보를 습득해도 그것은 앞에 묘사한 상황에서 존의 행동을 예측하는 데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 반대로 그 상황의 특이점과 관련된 상세한 정보는 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출입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가? 누가 보기에도 아파 보이는가? 술에 취해 있는가? 아니면 마약중독자처럼 몽롱해 보이는가? 점잖거나 깔끔하게 옷을 입었는가, 노숙자처럼 보이는가?
이 말을 듣고 나면 상황의 특이점을 고려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성격 특성과 성향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믿는다. 그러다 보니 상황요인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태도, 행동이 사회 환경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사회심리학자들은 일찍이 성격이나 기질보다는 ‘상황의 힘’에 주목했다. 사회적 상황의 특성에서 나는 차이가 사람들의 성격 특질에서 나는 차이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착한 사람이니까 분명 남을 잘 도울 것이다’, ‘공격적인 아이가 늘 문제를 일으킨다’ 같은 고정관념이 깊게 자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개인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생각의 지도》로 동서양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한 미시간대학교 심리학과 석좌 교수 리처드 니스벳과 ‘기본적 귀인 오류’라는 사회심리학 핵심 개념을 만든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 교수 리 로스는 《사람일까 상황일까(심심 刊, 원제: The Person and the situation)》에서 동조, 이타성, 갈등 해결, 집단 행동 등 60여 년간 진행된 사회심리학의 주요 연구들의 의미를 짚어내며 ‘성격보다 상황이 인간의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상황요인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보수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진보적인 환경에 놓였을 때 나타나는 놀라운 변화, 높은 연봉 못지않게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아시아계 학생들이 흑인 학생보다 수학 성적이 높은 이유 등)를 통해 우리의 인식과 판단, 행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상황의 힘을 설명하고 생각의 폭을 넓힌다.
말콤 글래드웰이 극찬한 “내 인생의 책”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방식을 완전히 뒤엎고 새롭게 생각하는 방식 제시
《아웃라이어》, 《블링크》, 《티핑포인트》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경영사상가 말콤 글래드웰은 2013년 10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리처드 니스벳을 꼽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려줬다. 수년 전 그는 리 로스와 함께 《사람일까 상황일까》를 썼다. 만약 당신이 그 책을 읽는다면 당신은 내가 쓴 《티핑 포인트》, 《블링크》, 《아웃라이어》 등이 속한 책의 장르를 포괄하는 하나의 플랫폼을 발견할 것이다. 이 책은 내 삶을 변화시켰다.”
이 인터뷰를 계기로 1991년 초판이 출간된 후 심리학 전공자들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던 《사람일까 상황일까》는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2011년 글래드웰의 추천 서문과 저자 후기를 더한 개정판이 출간되어 더욱 많은 독자를 만났다.
미국에서 출간된 후 28년 만에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그동안 상황과 성격을 둘러싼 여러 의문들, 예를 들어 ‘개인차가 약한 이유’(1장), ‘상황의 힘이 강한 이유’(2장), ‘사람마다 상황을 다르게 인식하는 이유’(3장), ‘성향과 상황을 혼동하는 이유’(6장) 등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준다. 저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참여한 사회심리학 연구 성과는 물론 우리에게 익숙한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97쪽)부터 솔로몬 애시의 선 길이 판단 실험(92쪽), 빕 라타네와 존 달리의 위급상황 실험(116쪽)까지 대표적인 사회심리학 실험들을 토대로 사회적 상황의 힘을 촘촘히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상황을 어떻게 지각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태도와 행동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설명한다. 누구보다 이 책의 핵심 내용과 효용을 날카롭게 포착한 말콤 글래드웰은 추천 서문에서 “일상 경험을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을 알려주는 탁월한 책”이라고 밝히며 “난생처음 안경을 착용한 뒤 갑자기 세상이 잘 보여 환희”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타인의 영향을 받는가
행동의 원인이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있다는 것이 사회심리학의 핵심 메시지이자 이 책의 큰 틀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앞뒤 맥락과 그 맥락에 영향을 미친 누군가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해볼 수 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태도나 행동에 그토록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일까? 심지어 알지 못하거나 자신의 삶에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인 경우에도 말이다. 이에 저자들은 두 가지 관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는 ‘사회적 영향력이 가진 정보의 힘’이다. 타인은 세상에 관한 좋은 정보 원천 중 하나다. 만약 내 앞에 있는 동물이 고양이처럼 보인다면 대부분 고양이가 맞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호한 문제를 판단할 때는 어떨까? 예를 들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기에게 그 일을 해낼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등을 판단할 때 말이다. 저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대체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은 결론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놓는 의견의 ‘기준점’을 살펴보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 기준점을 너무 살피지 않는 사람은 독선적이거나 무모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동료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과거에 그들의 의견이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훌륭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마음이 불편할 때 우리는 상대의 입장을 따라가거나, 상대를 내 입장으로 이끌거나, 내 분야와 영역에서는 상대가 유용한 정보 원천이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이 불편함을 해결한다.”(121쪽)
다른 하나는 ‘집단의 목표를 위한 규범 작동’이다. 저자들은 우리 모두가 수행할 과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면 협력이나 효과적 조치는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런 이유로 대다수 의견은 규범이나 도덕의 힘을 얻고 사람들은 이를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동의하라! 동의하지 않으면 소외된다. 집단은 자신들의 움직임을 막는다는 이유로 다수 의견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처벌하려 한다. 동의하지 않을 경우 동료의 분노를 불러올 수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길 주저한다.”(123쪽)
개인의 삶을 넘어서 인간관계, 조직 관리, 사회 정책에 이르기까지
상식과 직감에 기초한 쉬운 결론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의심, 논리적인 판단을 시작하는 법
사람들의 행동을 성격만으로 설명했을 때 우리는 잦은 실수를 저지르고 편견에 빠진다. 예를 들어 이해하기 힘든 행동(끔찍한 살인사건, 누군가의 기괴한 행동 등)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 보통 그런 행동을 한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아 쉽게 결론 내린다. 그 ‘사람’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순간, ‘사회적 영향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진다. 결국 문제를 단순화하면서 사회적 힘에 압도되어 벌어졌을 그 문제를 개선할 기회를 놓치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사회심리학은 ‘상황’의 중요성, 그 상황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를 기초로 《사람일까 상황일까》는 타인의 존재에 민감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 사회심리학 실험들을 면밀히 담아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하고 ‘상황’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법을 훈련하게 한다. 특히 8장에서는 사회심리학을 실제 사회 환경에 적용한 사례들을 언급한다. 의료, 복지, 교육 분야에서 상황적 변화를 만들어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사례들은 사람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세밀하게 실행한 사회 정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상황의 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사회심리학 실험들
1. 그 사람은 쓰러진 남자를 구할까? _달리와 뱃슨의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
선한 사마리아인 우화는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제와 레위인 모두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은 여행자를 그냥 지나쳐 서둘러 간 반면, 사회에서 천시받는 사마리아인은 여행자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내용이다. 이 우화를 곱씹던 프린스턴대학교 심리학자 존 달리와 대니얼 뱃슨은 잠재적 ‘선한 사마리아인’을 ‘바쁜’ 상태와 ‘바쁘지 않은’ 상태로 조작해보기로 했다.
연구자들은 실험에 참여한 신학생들에게 짧은 즉석 연설을 근처 건물에서 녹음할 테니 준비하라고 말했다. 일단 건물 위치를 설명하고 한 조건에 속한 신학생들에게는 “늦었다. 당신이 올 것을 기대하고 사람들이 몇 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 서두르는 게 좋겠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조건의 신학생들에게는 “녹음 준비까지 몇 분이 남았다. 하지만 바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지정한 건물로 가는 길에 ‘(약속에) 늦은’ 그리고 ‘(약속보다) 이른’ 조건에 있던 신학생 모두 우연히 출입구에 쓰러져 머리를 숙인 채 기침하며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을 만났다. 예상대로 약속에 늦은 신학생들은 10퍼센트만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었다. 반면 시간이 넉넉했던 ‘이른’ 조건의 신학생들은 63퍼센트가 도움을 주었다.
이 실험은 신학생의 개인 성향을 거의 보여주지 않지만 이타주의를 결정하는 상황요인에 주목하게 한다. 즉 상황 조작의 미묘한 세부사항 가운데 일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저자들은 달리와 뱃슨이 이용한 ‘(약속에) 늦은’ 상황 조작이 젊은 신학생들이 멈춰 서서 돕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틀림없이 곧 해야 할 연설을 좀 더 걱정하고 긴장하게 했으리라고 보았다. 이러한 조건은 신학생들이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반면 ‘(약속에) 이른’ 상황 조작은 젊은 신학생들이 좀 더 천천히 걷고 주변 상황을 더 깊이 생각하게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어쩌면 연설 약속을 지체할 수 있는 변명거리가 생긴 것(약속보다 일찍 도착해 어색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130~131쪽)
2. 정치 성향이 180도 바뀌는 이유_뉴컴의 베닝턴 연구
1935~1939년 베닝턴대학에는 대부분 중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젊은 여성들이 입학했다. 이들은 보수 성향의 정치 이념과 그들 부모의 투표 성향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베닝턴대학 환경에 노출된 이후 학생들의 관점은 자신의 가족 구성원이나 그들과 유사한 사회계층의 대다수 미국인과는 달리 진보 성향으로 옮겨갔다.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에 베닝턴대학에 입학한 1학년 학생 중 60퍼센트 이상은 공화당 후보(알프 랜던)를 지지했고, 30퍼센트 미만은 재임 중인 민주당 대통령(루스벨트)을, 10퍼센트 미만은 사회주의자(노먼 토머스) 또는 공산주의자(얼 브로더)를 지지했다. 이 선호도 비율은 부유한 학부모와 그들이 속한 사회계층 사람들의 성향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온 지 1년 조금 넘은 2학년 학생 중에는 이미 진보 성향으로 바뀐 학생이 상당히 눈에 띄었다. 랜던과 루스벨트가 대략 비슷한 수준의 지지(43퍼센트)를 얻었고, 급진적인 후보 둘은 나머지 14퍼센트의 지지를 나눠 갖고 있었다. 3, 4학년의 변화는 더 극적이었다. 단지 15퍼센트만 랜던(그들의 부모 대다수가 확실히 지지하는 후보)을 지지했고 약 54퍼센트가 루스벨트를, 30퍼센트 이상이 급진적 후보 두 명 중 한 명을 택했다.
이러한 지지 비율은 사회 상황이 꽤 많은 사람의 사회적·정치적 태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족의 태도와 가치에 반하는 걸 알면서도 이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학생들이 베닝턴대학을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꾸준히 진보 성향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미시간대학교 사회심리학자 시어도어 뉴컴은 베닝턴 사례를 관찰한 뒤 사회적 영향력에 관해 몇 가지 유의미한 지점을 짚어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강한 소속감, 획일성, 집단 압력의 측면에서 관찰된 학생들의 특징이었다. 즉 보수주의 학생보다 정치적으로 활발한 진보주의 학생이 친구로 선택받거나 리더로 뽑힐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진보주의 학생들은 확실히 차별화된 집단을 형성했고 새로 들어오는 대다수 학생에게 베닝턴대학에서 만나는 동급생은 주요 참조집단이 되었다. 이들은 동급생에게 속하거나 인정받기를 갈망하며 동급생의 가치를 내면화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에게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은 동급생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으며 정치 성향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뉴컴은 이를 두고 가족에게 결속되고 발생 가능한 갈등이나 반감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했기 때문일 것으로 분석했다.(177~179쪽)
3. 연기가 나는 위급 상황에도 대피하지 않는 사람들 _ 라타네와 달리의 위급상황 실험 외
사회심리학자 빕 라타네와 존 달리는 ‘위급 상황 시 주변인 개입 연구’를 진행했다. 실험 참자가는 모두 컬럼비아대학교 남자 학부생들로 이들은 혼자 설문지를 작성하거나 두 명의 다른 실험 참가자와 함께 설문지를 작성하거나 이후에 벌어질 ‘응급’ 상황에서 무표정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연구자에게 지시받은 실험 협조자 두 명과 함께 설문지를 작성해야 했다. 응급 상황은 벽의 통풍구를 타고 ‘연기’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해 결국 방 전체에 가득 퍼지는 것이었다. 혼자 있던 실험 참가자는 75퍼센트가 방에서 나와 연기를 신고했지만 무표정한 두 명의 실험 협조자와 함께 있던 실험 참가자는 10퍼센트, 세 명이 함께 있던 집단에서는 38퍼센트만 이 상황에 개입했다.
뉴욕대학교에서는 이와 유사한 다른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전화로 자신처럼 실험에 참여하는 중이라고 믿고 있던 또 다른 실험 참가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대방이 간질 발작을 일으킨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실험 참가자가 자신이 그 소리를 들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을 때는 85퍼센트가 도움을 주려고 했다. 실험 참가자가 또 다른 한 명이 그 소리를 들었다고 믿을 때는 62퍼센트,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네 명 더 있다고 믿을 때는 31퍼센트가 도움을 주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실험 참가자들은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을 때 더 빨리 도와주었다. 실제로 가짜 발작 소리를 들은 뒤 첫 1분 내에 혼자 들었다고 생각한 실험 참가자의 50퍼센트가 피해자를 돕기 위해 왔지만, 자신이 그 소리를 들은 다섯 명 중 하나라고 믿은 사람은 누구도 1분 내에 오지 않았다.
실험이 끝난 뒤 진행된 실험 참가자와의 인터뷰는 주변인이 홀로 있는 경우보다 집단으로 있을 때 사람들이 잠재 개입 상황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연기가 환기구로 들어올 때 집단 구성원은 연기를 에어컨에서 새는 것이거나 화학 실험실에서 나오는 증기로 해석했다. 이들은 사고 피해자가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소리를 낼 때도 살짝 다친 사람이 불평을 늘어놓거나 욕을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116~119쪽)
4. 실패할 운명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_흑인 학생들의 낮은 성적을 끌어올린 비밀
수학자 유리 트레이스먼은 자신이 몸담은 버클리대학교에서 수학 입문 수업을 듣는 흑인 학생의 성취도가 낮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 수업에서 낮은 학점을 받은 학생은 대부분 자연과학이나 의학 쪽으로 갈 길이 실질적으로 막혀버렸다. 그보다 수학 입문에 등록한 흑인 학생의 3분의 2가 버클리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한다는 점이 더 심각했다.
트레이스먼은 인류학자로 변신해 흑인 학생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따라가 보았다. 그리고 수학과 과학 과목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 아시아계 학생들의 삶도 함께 따라가 보았다.
트레이스먼이 발견한 이들의 가장 놀라운 차이점은 흑인 학생은 혼자 공부하는 반면 아시아계 학생은 집단으로 공부한다는 사실이었다. 수학을 여럿이 함께 공부하는 이점은 분명해 보였다. 학생들은 문제를 푸는 데 실패해도 의기소침해질 필요가 없었다. 집단 내 누군가에게 해결책이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집단으로 공부할 때 유사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학생들과 상호작용하며 사회적 지지를 얻었고 각자 다른 사람의 비법과 전략을 보고 자신에게 적용해볼 기회를 누렸다.
트레이스먼은 새로 입학한 흑인 학생들에게 수학을 집단으로 공부하는 특별한 ‘우등’ 프로그램에 등록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관찰하며 격려했는데 그 결과는 극적이었다. 특별 집단 학습 프로그램에 참여한 흑인 학생은 수학 입문에서 평균적으로 백인과 아시아계 학생과 동일한 성적을 받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흑인 학생의 중도 탈락 비율이 현저히 줄어들어 그동안 높은 성취를 이룬 다른 두 집단과 동일한 수준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례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상황 조작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불이익을 받는 소수집단 학생이 개인의 한계나 사회적 장벽, 불평등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한다.(476~479쪽)
똑똑한 소비자, 현명한 개인, 적극적인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 줄 사회심리학적 사고법
《사람일까 상황일까》를 번역한 조직·리더십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더랩에이치 김호 대표는 “이 책을 직장에서 일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참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역자 후기에서 “살다 보면 더러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접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대개는 속으로 그 사람의 못된 성격을 탓하며 속상해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즉, 내가 상대를 대하는 방식(그에게는 상황)을 바꿔볼 궁리를 한다. 이는 혼자 속상해하는 것보다 효과적이고 자존감도 높여준다.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는 중요한 상황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결국 상대가 바뀌기를 기대하기보다(그런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내가 그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보다 과학적이고 현명한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하며 이 책을 개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상황’에 초점을 맞춰 사회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연구 지점들을 담아낸 《사람일까 상황일까》는 사회심리학의 지적 성취를 맛볼 수 있는 고전으로 손꼽힌다. 이는 리처드 니스벳과 리 로스가 평생 사회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쌓아올린 학문적 성과와 깊은 통찰을 이 책에 오롯이 담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책은 글래드웰의 고백처럼 《아웃라이어》를 비롯해 《넛지》, 《생각에 관한 생각》, 《프레임》 같은 대중교양서가 등장하는 데 영향을 미친 사회심리학 분야의 원형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사회심리학 연구의 60년 흐름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은 심리학 전공자는 물론 연구자들에게 ‘상황의 힘’을 둘러싼 사회심리학 핵심 연구들을 한 눈에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사회심리학의 태동부터 성격심리학과의 논쟁, 문화심리학의 발전, 행동경제학에 관한 폭발적 관심까지 빠짐없이 짚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인간의 사회행동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지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더불어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서 살아가는 독자들(상대를 설득하는 업무를 하는 사람, 원만한 인간관계를 원하는 사람, 조직 관리자, 교사, 부모, 사회문제 해결에 매달리는 사람 등)에게는 개개인이 목격하는 사회 사건, 나아가 언론 보도로 전해 듣는 사건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안내하는 지적 교과서이자 세상을 좀더 선명하고 넓게 보는 새로운 안경이 되어준다. 누구나 어떤 종류든 개인의 성격이나 성향이 담긴 듯한 행동을 마주할 때가 있다. 저자들은 이 때 잠시 판단을 멈추고 상황을 생각해보면 상대를 판단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서 다루는 폭넓은 사회심리학 지식과 통찰은 우리가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언제든 반복할 수 있는 생각의 실수를 줄이고 세상을 더욱 논리적으로 바라보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