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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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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제로)

저자
채사장 저
출판사
웨일북
출판일
2020-02-04
등록일
2020-04-08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34MB
공급사
YES24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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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본문 일부



파잔(phajaan)은 코끼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의식이다. 야생에서 잡은 아기 코끼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뒤 저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날을 굶기고 구타하는 의식. 절반의 코끼리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지만, 강인한 코끼리는 살아남아 관광객을 등에 태우며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코끼리는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들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고 본능의 심연에서 어렴풋하게 냉혹한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엄마를 찾아선 안 된다는 것과, 몽둥이의 고통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코끼리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유를 향한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파잔 의식을 시행하는 몽둥이를 든 가난한 자들에게 분노가 솟구친다. 하지만 분노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든 문제가 그러하듯 이것이 단순히 선악의 문제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파잔 의식을 시행하는 자들도 피해자일지 모른다. 그들의 영혼도 이미 산산이 부서진 것일지도 말이다. 그들이 처음 아기 코끼리를 구타하는 것을 주저할 때, 그의 가정과 사회는 그에게 친절하게 말했을 것이다. 질문을 멈추라. 그것은 먹고사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네가 지켜야 할 사랑하는 이들의 생존을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하라. 결국 그는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했을 것이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 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신의 이야기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어느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가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이미 파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우주의 크기를 들여다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초월적 거대함 앞에서 내 일상의 사소함은 너무도 하찮게 느껴진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인류가 ‘신’을 놓지 못하는 철학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가치 때문이다. 이 거대한 세계를 창조한 신이 인간의 기원일 것이라는 상상은 나의 존재론적 하찮음을 해소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위안도 우주의 크기를 가늠할 때면 쉽게 무너지고 만다. 만약 모든 존재가 실제로 신의 창조로부터 비롯되었다면, 그가 초공간의 다중 우주를 창조했고 영원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 속에서 수없이 점멸하는 미니 우주들의 탄생과 소멸을 지켜봤다면, 그리고 그중 하나의 미니 우주에서 수천억 개의 은하가 탄생하고 죽는 것을 지켜보고, 그중 하나의 작은 은하 변두리에 위치한 먼지보다 작은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에서 수많은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본 이후에, 그 지구 위에 잠깐 존재하고 사라지는 인간의 삶에 그토록 개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기나 한 것일까?

-<우리 우주의 크기> 중에서



예쁜꼬마선충의 프로그램화는 인간의 프로그램화에 대한 생각으로 쉽게 확장된다. 물론 인간의 뉴런은 대략 100억 개로, 302개뿐인 예쁜꼬마선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고 복잡하다. 하지만 이것은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양적인 차이다. 만약 가까운 시일에 인간의 뉴런 정보가 선명히 밝혀지고 이에 대한 정보를 프로그램화한다면, 우리는 프로그램 안에서 인간처럼 반응하고 말하는 그 무엇인가를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프로그램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적 논쟁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프로그램 인간이 질문을 던지는 날에 우리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탄생> 중에서





위대한 스승은 수많은 시대와 장소에서 탄생했다. 그중에서 특히 경이로운 시기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축의 시대’라 불리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축의 시대는 인류 정신사에 거대한 전환점이 된 시대였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고타마 싯다르타가 등장했고, 중국에서는 노자와 공자가 활동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태어났다.

축의 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다. 그는 1949년에 출간한 《역사의 기원과 목표》 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모든 정신적 기원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대로 축의 시대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공통적으로 위대한 스승들이 거대 사상을 설파했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바로 앞선 시기가 세계 각지에서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증가를 겪은 격동의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자연에서 태어나 넓은 들판을 떠돌던 인류는 이 시점부터 거대한 도시에서 태어나 문화와 상징체계 속을 살아가게 되었다. 도시 생활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혔고, 경제, 정치,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으며, 이는 폭력과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어쩌면 축의 시대는 처음으로 문명을 일으키고 그로 인한 문제에 직면한 인류가 필연적으로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의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스승들> 중에서



역사와 신화의 경계는 마치 잠에 빠져드는 순간과 같다. 늦은 밤 이부자리에 누워 잠에 들기 직전을 기억해보자. 깨어 있음과 잠듦의 경계는 너무도 모호하다. 역사가 깨어 있는 것이라면 신화는 꿈을 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중간 어디쯤이다. 어디까지를 사실로 보고 어디까지를 비유와 상징으로 봐야 하는지 선명히 나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역사학자들에게 머리 아픈 일이겠지만, 자기 삶을 스스로 해석하며 살아가는 보통의 우리들에게는 어떤 면에서 매력적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역사와 신화 구분의 모호성. 그것은 중국의 시간에서도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문명이 그러하듯 중국의 역사도 창조신화로 시작된다.

-<역사적 배경> 중에서



노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덕이 없는 사회에서는 인이 강조되고, 인이 없는 사회에서는 의가 강조되며, 의마저도 없는 사회에서는 예만 강조된다. 쉽게 말하면, 자기 내면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인자함이 중요시되고, 인자함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의리가 중요해지며, 의리가 사라진 사회에는 예절이 강요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어떤 의미인지 와 닿지 않고 무슨 말장난인가 싶었는데, 사회생활을 하고 경제 활동을 하고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집단들을 거치면서 노자의 통찰이 새삼 날카롭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렇지 않던가?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내면의 질서나 인자함을 기대할 수 없다.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전에 우선 말과 행동과 신체를 제어하는 예절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성장하면 그들은 친구와의 약속과 의리가 왜 중요한지를 스스로 알게 되고, 장년이 되어서는 인자함을 체득하게 되며,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 내면의 질서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위로부터 강제되는 질서와 규율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시되지만, 때가 이르러 그 사회가 성숙하면 구성원 각각의 사상의 자유가 인정되고 그들의 권리가 보장된다.

-<도덕경의 내용> 중에서





우리가 고대인의 사상과 종교를 들춰보고 그들이 말하는 바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들 중 누군가가 진리를 말했고 다른 누군가가 거짓을 말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가 찾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세계관의 대륙에 발을 딛고 산다.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은 나의 세계관이 내가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나의 한계이자 울타리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세계관이 답한다. 기독교인은 결국 기독교적 모범으로 자신의 삶을 수렴하고, 불교인은 불교적 모범으로 수렴하며, 과학주의자는 유물론적 결론에, 자본주의자는 경제적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가 고대인의 사상과 종교를 들춰보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수많은 낯선 대륙에 상륙하기 위해서다. 다른 세계관에 발을 디딤으로써 나의 작은 세계관의 영토를 가볍게 넘어서기 위해서다. 수많은 세계관의 대륙을 탐험하고 돌아온 사람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자신의 세계관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자아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중에서



최근의 기술 발전과 VR 기기의 등장으로 현대인은 과거 사람들보다 이러한 정신적 작용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VR 기기를 사용할 때, 이것이 그저 가상임을 알면서도 시각과 청각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마음을 빼앗긴다. 게임 안에서 괴물이 달려오면 몸을 움츠리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만약 여기에 후각, 미각, 촉각이 더해지고 기술이 더 정교해지면서, 이것이 가상이라는 사실도 잊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완벽한 실재라고 느낄 것이다.

-<대승불교의 두 사상> 중에서



쉽게 말해서 플라톤 이후의 서양인은 다음과 같은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다. ‘불완전한 현실 너머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세계가 존재한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관이 갖는 의미다. 이데아론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플라톤 이후의 서양인이 이데아론을 기본 세계관으로 가졌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은 다음과 같다. 세계의 분리. 서양인의 세계는 이제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다. 이 세계는 불변하고 완벽하며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진짜 세계다. 다른 하나는 현실의 세계다. 이 세계는 변화하고 불완전하며 우리의 오감에 의해서 경험되는 허상의 세계다. 이데아론은 세계를 이와 같이 둘로 분절한다는 의미에서 이원론적 세계관이 된다.

(중략) 이원론적 세계관은 2천 년 가까이 서양인의 근원적인 사유 체계로 작동해왔다. 이것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갖고 있었다. 우선 긍정적인 면으로는 학문과 과학 기술의 발달, 그로 인한 물질적 풍요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원론에 의해 독립적인 존재로 분절된 자아와 세계는 각각 주체로서의 ‘인간’과 대상으로서의 ‘자연’으로 기능했다. 인간은 세상의 주인으로서 물질적 자연을 분석하며 이것의 기능과 원리를 빠르게 발견해냈다. 이에 더해 세계 자체도 둘로 나뉘었다. 문명의 상징이자 계몽의 주체로서의 ‘서양’과 야만의 상징이자 계몽의 대상으로서의 ‘동양’으로 이분화 되었다. 이것은 유럽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함으로써 서구에 의한 착취와 이에 따른 풍요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은 다만 주체의 관점일 뿐, 대상으로 규정된 존재의 억압과 폭력은 은폐되었다. 이것이 이원론의 부정적인 면이다. 산업화를 거치며 자연은 파괴되었고, 식민지 동양은 유린되었으며, 여성은 오랜 시간 억압받았고, 이성에 대비되는 감정과 욕망과 몸은 불결한 것으로 낙인찍혀 교화와 교정의 대상이 되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서구 사회는 세계 절반의 고통에 무관심했다.

-<플라톤과 이데아론> 중에서



눈앞에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있다. 나는 이 사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본다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우선 광원이 있어야 한다. 태양이나 형광등이나 촛불이나 빛이 나오는 근원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이 광원에서 입자이자 파동인 광자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광자가 사과의 표면과 만나서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튕겨 나간다. 튕겨 나온 광자의 일부가 눈으로 들어오고 망막의 시각 세포를 자극한다. 시각 세포는 빛 에너지를 흡수한 뒤에 이를 전기적 신호로 바꾼다. 이 전기적 신호가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전달된다. 뇌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어떠한 감각기관도 없지만 신체의 각 부분에 연결된 시신경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받아들인다. 이 신호들은 종합과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뇌가 해석한 이미지가 나의 내면에 드러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느낀다. 눈앞에 잘 익은 빨간 사과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눈에서 시작되어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빨간색’과 관련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사이에는 그저 전기적 신호만이 있다. 빨간색이라는 것은 뇌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빨간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신체 밖에 있는가, 아니면 내 안에 있는가?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 후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의 눈앞에 다채로운 색깔들로 드러나는 외부 세계는 사실 나의 내면 세계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외부 세계의 실체가 도대체 어떤 모습인지, 혹은 모습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건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전부니 말이다.

-<관념론의 의미> 중에서



현상 세계 너머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종류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형태라는 것은 실제로 단단한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가 사과를 단단하게 느끼는 것은 그것이 정말로 꽉 찬 무엇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전자기력의 반발 때문이다. 우리의 손이 사과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사과의 표면에 위치하는 원자들과 손의 표면에 위치하는 원자들이 전자기력으로 서로를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과의 표면이 매끄럽게 가득 채워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가시광선이 사과 표면 원자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전자에 의해서 튕겨 나가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인류는 원자가 텅 빈 무엇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개별 원자를 이루는 원자핵과 전자를 제외하면 원자의 99.999퍼센트는 텅 빈 공간이다. 텅 빈 원자들이 모여 있는 빨간 사과도 99.999퍼센트는 텅 빈 공간이고, 우리의 신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이들은 그럼에도 0.001퍼센트는 물질이니 원자도 가득 찬 물질로 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과자 봉지 속에 질소를 채우고 과자를 0.001퍼센트만 넣어서 팔아도 고민 없이 구매해야 할 것이다.

(중략)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 불교의 일체유심조, 칸트의 관념론.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궁극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현대 물리학도 이제 이러한 대열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세기 양자역학의 등장은 기존까지 배제되었던 관찰자를 불러내고 있다.

-<세계의 실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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