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최소한의 선의

최소한의 선의

저자
문유석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일
2021-12-12
등록일
2022-05-09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37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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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인류가 공유해온 타협의 기술이다”

저마다의 가치관이 부딪히고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는,
누가, ‘모두의 약속’을 위반하는지 따져보면 된다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작가가 말하는 ‘법치주의’라는 타협의 기술

당연하게 누렸던 일상을 그리워할수록, 그걸 지탱해왔던 기둥들의 무게가 새삼 느껴졌다. 우리는 약속, 규칙, 양보, 거래, 상호이해, 자제, 존중의 힘으로 배낭을 메고 낯선 도시로 떠날 수 있었고, 한밤중에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사 먹을 수 있었다. 그 힘이 제도화된 것이 법이다. 법이란 사람들 사이의 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선線’인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최소한의 선善’이기도 하다. 이것이 문명 세계를 떠받들어온 기둥이다. 단순히 위반하면 안 되는 규칙이나 강제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인류가 발전시켜온 공통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법은 문명 세계의 기둥이다. 그 기둥이 세계 도처에서 무너지는 듯한 공포를 느끼던 2020년 봄의 어느 날, 나는 법에 대해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_「프롤로그」에서

극심한 갈등과 날 선 증오에 상처받고 지친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선의’

인터넷 포털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건사고 소식이 올라온다. SNS나 유튜브에서는 저마다의 비판과 성토가 쏟아지고 찬반 여론은 극렬하게 부딪히지만 어느새 사건은 금세 잊히고 서로에 대한 분노의 앙금만 남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익숙해진 풍경이다. 각자의 옳음과 그름이 상충하고, 이해관계가 다층적으로 얽힌 만큼 판단의 기준을 명확히 세울 필요를 느끼지만,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저성장 시대에 진입한 만큼 나눌 수 있는 파이는 점점 작아지는데 장기화하는 코로나 팬데믹마저 우리가 지켜온 가치들에 심각한 교란을 일으켜 서로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건강한 가치 판단과 공존을 위한 타협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다.
『최소한의 선의』는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를 통쾌하게 비판한 문유석 작가가, 한 사회의 개인들이 공유해야 할 가치들은 무엇일지 법학적 관점에서 경쾌하고도 예리하게 짚어보는 책이다. 인류가 발전시켜온 공통의 권리선언이자 모두의 약속인 인간 존엄성과 자유, 평등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무색해지는 상황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시대. 급속한 과학기술 발전과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경기 침체로 너나없이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시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오징어 게임’이 아닌, 지혜로운 공존을 위한 전략은 과연 무엇일까.

차마 함부로 남에게 해를 가하지 못하는 마음, 인간이 존엄한 이유

대한민국의 모든 법률은 최고법인 헌법에 의거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헌법은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어떤 특정 부류나 계층이 아닌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것이 무참하게 훼손당하고 모욕당하는 모습을 너무 자주 접한다. 책의 1부 ‘인간은 존엄하긴 한가’에서는 인간 존엄성 개념이 확립되어온 역사를 조목조목 살피며 이를 중심으로 한 헌법적 가치를 망각한 듯한 한국사회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인간 존엄성은 감상적 휴머니즘이 아니다.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합의해온 가치이자 우리나라 법 체계의 출발점이고 헌법의 핵심이다. 만일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우리 삶 속에 체화되지 않았거나 위선적이고 공허한 소리일 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진 자부터 소비자에 이르는 그 모든 ‘갑질’과 횡포와 폭력이 만연한 나머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인간성을 허상처럼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지, 법이 왜 인간 존엄성을 최상위의 가치로 두는지, 누군가 반사 이익을 얻더라도 왜 ‘모두의 인격’이 법으로써 존중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글들로 이루어진 1부에서는 23년간 법관으로서 법을 공부하고 실제에 적용해온 문유석 작가의 송곳 같은 논리가 유려하게 펼쳐진다.

헌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평소 늘 도덕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존엄하다는 것이 아니다. 신이 부여한 특성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최소한 이성과 양심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인권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에 그의 인종・성별・종교・지능・재산 등과 관계없이, 또한 그가 선한지 악한지, 성인군자인지 범죄자인지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_본문 41~42쪽

인간이라는 이름의 공해 속 우리는
제각각 달라도, 불편해도, 타협하며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 지구상의 인간 군상과 세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를 산다. 자신을 전시하기도 하고 남들의 삶을 엿보기도 하고, 부러워하거나 비판하기도 한다. 미처 소화되지 못한 날것의 감정이 여과 없이 흘러넘치는 공간에서 사생활 침해와 인격 살인은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소셜 미디어 플랫폼 기업은 알고리즘을 통해 그러한 무분별한 비방과 혐오를 강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못마땅하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할 권리는 애초부터 그 누구에게도 없을뿐더러, 인간에게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천부인권적’ 자유가 있다.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보이는 누군가가 눈엣가시처럼 보일지라도 함부로 그를 비난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곳에서 멈추어야 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자유는 무엇일까. 이동하고, 직업을 갖고, 학문을 추구하고, 뭔가를 표현하고 등등 멋진 무엇을 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자유. 그것은 그저 홀로 있는 내 공간 안의 자유, 내 머릿속 생각의 자유일 것이다. 뭘 거창하게 하기 이전에, 태어난 내 모습대로 그저 있을 자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동매가 슬프게 되뇌던 독백 같은 대사처럼 말이다. “아무것도요. 그저 있습니다, 애기씨.” (…) 자유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고결하고 도덕적이고 훌륭한 생각만 보호하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생활만 보호하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가 있다. _본문 100~101쪽

도대체 왜, 법은 피해자를 외면하고 범죄자들에게 관대할까

모든 사회적 이슈마다 여론은 팽팽하게 갈리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흉악범죄에 대해서만큼은 온 국민이 분노와 슬픔에 치를 떤다. 범죄자에게 사형을 구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뉴스 기사 댓글에 줄을 잇는다. 그러나 최종 판결은 그러한 정의로운 분노를 달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태는 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까. 문유석 작가는 우선 우리 헌법질서에 내재한 ‘인본주의’와 ‘공리주의’가 형벌에 대해 ‘필요 최소한’의 관점으로 접근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법이 인간 사이에 필요한 ‘최소한의 선의’라면 형벌은 사회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악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법치주의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국민의 법감정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그렇다 하더라도 법이 ‘인간’ 그 자체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날카롭게 되묻는다. 법이 인간의 감정과 편향을 너무 쉽게 간과하는 나머지, 법적 효능에 대한 시민의 신뢰마저 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예전부터 피고인의 호소를 잘 경청하고 선처를 잘 베푸는 법관은 ‘생불’ 소리를 듣곤 했다. 반면 법정구속을 칼같이 하고 높은 형량을 선고하는 법관은 모질다, 모났다는 소리를 듣는다. 왜일까. 법관이 접하게 되는 사람들의 입장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검사는 사무적인데 반하여 피고인과 그 가족, 변호인 들은 목숨을 걸고 판사만 쳐다본다. 게다가 판사의 인간관계는 협소하다. 동료였던 법관도 선배였던 법관도 언젠가는 변호사가 된다. 판사 주변에는 시간이 갈수록 변호사만 가득해진다. 그리고 변호사는 피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선처 잘하는 판사를 싫어할 변호사는 없다. ‘인간을 이해하는 법관’ ‘생불’이라고 칭송하며 그 재판장에게 자기 사건이 배정되기를 바랄 것이다. 칭송에는 돈이 들지 않지만 판사의 선처는 변호사에게 돈이 되기 때문이다. _본문 155~156쪽

공정한 경쟁은, ‘사회적 배려’ 때문에 가능하다

현재 우리 사회 최대의 화두인 공정성과 정의의 문제를 평등이라는 헌법의 핵심 가치와 연결해 풀어가는 책의 4부는 이 책의 백미다. 현대적 평등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존 롤스의 『정의론』부터 최근까지 전 세계적 화제를 모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르는 논의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기도 하고, 공정한 경쟁을 두고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논의가 지닌 의미와 문제점을 예리하게 진단해보기도 한다. ‘약자는 무조건 선하다는 인식의 오류’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언더도그’라는 용어를 동원하며 차별시정 조치에 반발심을 품는 전 세계적 약자 혐오 현상에 대한 글, 인간의 노동력의 많은 부분이 로봇으로 대체될 미래 인공지능 시대에서 변화될 평등 개념을 논하는 글 또한 탁월한 논리 전개를 따라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오래 공유하고 지켜온 가치들을 급변하는 시대에 어떻게 새롭게 적용하고 변화시켜갈 것인지에 관한 작가의 질문과 답은 혼탁한 우리 시대에 내리는 또하나의 명쾌한 처방전이다.

헌법에 있는 평등에 관한 조항이 무엇인지 물으면 거의 대부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대답한다.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법 앞에’ 평등하기만 하면? 우리는 거기에 머물지 말고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에서 평등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국민’이다. 모두가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사회는 평등하다고 부를 수 있다. 모두에게 똑같은 분배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법 앞의 평등’만으로는 부족하다. ‘법에 의한 평등’이 필요하다. _본문 232~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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